[송재범의 교육답게] 메타버스 시대, 우리 교육은?
[송재범의 교육답게] 메타버스 시대, 우리 교육은?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3.01.05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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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범(서울 신서고등학교장 / 한국국공립고등학교장회 회장)
송재범 서울 신서고등학교장 / 한국국공립고등학교장회 회장
송재범 서울 신서고등학교장 / 한국국공립고등학교장회 회장

“아바타의 모습으로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함께 메타버스가 오고 있다. 메타버스에는 잘난 사람도 살고 인공지능에 의해 일자리를 잃게 될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도 산다.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밝고 투명한 공기 속에서 모든 것이 무중력의 액체 속에 잠긴 듯한 그곳이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안 속에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메타버스란 무엇인가』, 이인화)

계묘년(癸卯年) 토끼의 해.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의 그림자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달나라에 가볼 수 있는 세상이다. 더 나아가 메타버스로 구현된 달에서 살아있는 토끼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시대다.

거기에서 만난 토끼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타버스는 단순한 현실 세계의 모방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 재미있고 더 새로운 현실을 꿈꾸게 하는 가능성의 세계’라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안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가능성의 세계, 우리 교육은 어떤 가능성을 꿈꾸고 있는가? 메타버스 시대에 교육의 의미는 무엇인가?

교육학 개론에서는 교육의 의미를 교육(敎育, Education, Pedagogy)이라는 단어의 어원(語源)으로부터 도출한다. 이로부터 다양한 의미로 교육을 설명하지만, 공통으로 언급되는 성격이 있다.

변화, 발전, 가능성 등이다. 교육의 목적은 인간의 변화에 있다. 가치관의 변화, 행동의 변화, 능력의 변화 등이다. 이때 변화란 당연히 바람직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부조리한 인간, 퇴보하는 인간을 목적으로 교육하지는 않는다.

교육(공교육, 학교 교육)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학교라는 시스템을 만들고 엄청난 물량을 투입한다. 목적 달성을 위해 지금의 어려움을 참아내고 발전하는 자신의 모습에 기뻐하기도 하며, 애초에 그렸던 가능성을 넘어 더 큰 가능성을 그리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메타버스는 단순한 기술 발전의 패러다임을 넘어 교육이 꿈꾸는 가능성 영역의 무한한 확대로 연결될 수도 있다. 어쩌면 메타버스는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학교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의 교육 이야기는 이러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가능성보다는 현실성을 앞세우며 합리적 비판보다는 단편적 비난으로 교육을 주눅 들게 만든다.

교육적 고려보다는 정치적 접근에 휘둘려서 교육의 자존감에 상처를 내기도 한다. 이렇게 교육을 힘들게 하는 우리 교육 담론의 문제점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들어본다.

첫째, 교육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하다. 소위 교육 전문가와 우리 교육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은 교육에 대해 많은 글과 말들을 쏟아낸다.

그런데 그 많은 글과 말들의 마무리는 기막힐 정도로 유사하다. 현실의 정확한 인식과 함께 교육의 본질적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론적 충고다.

지금까지 교육의 특정 사안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한 조건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결론은 교육의 본질 짚어보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주장은 보기 어렵다.

그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논자(論者)가 생각하는 교육의 본질적 의미를 제시하지 못한다. 교육의 조건, 교육과 연관된 것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의 의미가 무엇인지 교육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둘째, 역사와 맥락이 없는 교육을 말한다. 교육을 역사적 맥락의 흐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갖추어진 정답 개념으로 본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문제점이 나타나면 이전의 것을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 본다. 이전의 것이 잘못되었다는 전제에서 새로운 교육의 방향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교육은 정답이 아니라 흐름이고 변화다. 문제점이 있어보이는 사안도 특정한 시대와 맥락에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타당성과 의미를 바라보아야 한다. 대입 수능 무용론이 그 사례다.

나는 수능 방식 자체가 출발점부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1993년에 시작한 수능이 30년이 지난 지금의 맥락에서는 그 타당성과 시효가 다 되었을 뿐이다. 교육을 말함에 있어서 이전의 것을 단칼에 비(非)교육적이거나 반(反)교육적 행위로 단죄해서는 안된다.

셋째, 이해당사자의 관점에서 교육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교육 문제를 말하고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교육의 의미는 제각각이다. 심하게 말하면 우리에게 객관적 의미의 ‘교육’은 없다.

대학에는 현실에 토대를 두지 못한 ‘교육학’이 있을 뿐이고, 교육부(교육청)에는 표를 의식한 ‘교육 정책’이 있을 뿐이다. 학교 현장에는 소위 명문 학교 입시를 위한 ‘교육열’만 있을 뿐이다.

교수는 이론 중심의 교육학만 가르치고 교사는 경험 중심의 수업만 하며, 교장(감)은 학교 경영만 하고 행정실은 교육 행정만 한다. 그리고 교육 당국은 지시와 관리만 하며, 교육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일반 국민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교육의 의미를 재단(裁斷)한다.

우리 모두 함께하는 교육에 대한 공유지는 없다. 모두 학생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학생의 의견을 들어보지는 않는다.

이렇게 발전적 담론(談論)보다는 정파적 언쟁(言爭)의 대상이 되어 버린 우리 교육, 어떻게 교육적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교육의 위상을 바로 세울 수 있을까?

나는 그 방법으로 ‘균형의 교육’을 제시한다. 지금 우리 교육은, 그리고 학교는 너무 피곤하다. 왜? 그 이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너무나 많은 요구들이 쏟아져들어오기 때문이다.

교육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진다. 학교는 교실이 아니라 실험실이 되어버렸다. 그 실험의 과정에서 우리 교육은, 그리고 학교는 출렁거린다.

심한 배멀미를 느낀다. 이런 현실에서 지금 우리 교육에는 무엇보다도 균형 잡기가 필요하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교육’도 필요하지만, 온전한 상태로 항해할 수 있는 ‘균형의 교육’이 시급하다. 그렇다면 어떤 것부터 균형을 잡아야 할까?

첫째, 현재와 미래의 균형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미래’라는 단어가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 메타버스 등의 문구가 새겨진 깃발들이 교육의 대열 앞에서 펄럭이며 미래를 향해 따라오라고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왠지 자발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는 기분이다. 과잉화된 미래, 강요된 미래처럼 여겨진다.

원래 교육 자체가 미래를 함유한 활동이다. 현재보다는 발전적으로 변화될 학생의 가능성을 보고 수행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싶은 유토피아적 사회의 기획, 그것을 이루기 위한 미래지향적 교육 방향의 설계는 당연하다.

하지만 이 미래의 기획이 현재의 삶을 혹사시키는 강요가 되어서는 안된다. 현재의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미래의 행복을 꿈꾸지 못한다. 그가 그리는 것은 미래의 행복이 아니라 현재로부터의 탈출일 뿐이다.

현재를 위한 교육, 미래를 향한 교육의 균형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미래형 민주시민으로서의 학생만이 아니라 현재형 민주시민으로 살아가는 학생도 필요하다.

우리가 메타버스에서 만나는 세상은 단순한 미래형 모방과 가상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기도 하다. 메타버스는 우리 교육에게 가상과 현실, 미래와 현재를 함께 요구하고 있다.

둘째, 배움과 가르침의 균형이다. 배움의 공동체!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지만, ‘배움’이 교육의 핵심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교육이란 ‘가르칠 교(敎)’와 ‘기를 육(育)’이라는 어원에서 보듯이 학생 중심의 배움보다는 교사 중심의 가르침에 중점이 있었다. 배움의 주체로서 학생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교육에 대한 저항으로 학습자 중심의 배움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근대학교 중심의 획일적 가르침에 대한 대항적 행위로서 ‘배움학’이요, ‘페다고지(pedagogy)’로 대표되는 기존의 학교학에 대한 대안적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프레이리에게 변혁의 길을 묻다』, 심성보).

학생은 스스로 배우는 학습자가 되고, 교사는 가르치는 자에서 지원자나 촉진자가 되었다.

그런데 ‘배움[학습](learning)’이 강조되면서, 정작 교육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의 위기는 ‘가르침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다.

배움[학습] 담론이 전면화되면서 그 무엇보다 교사의 가르침이 설 자리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과 배움의 균형이 필요하다. 가르침과 배움이 함께 일어날 때 진정한 교육이 탄생한다.

학교 교육에서 학습자의 욕구와 흥미를 중시하는 ‘학습주의’가 인류 문화의 유산을 전달하는 ‘가르침’의 역할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방법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교육주의(가르침주의)와 학습주의(배움주의)의 극단적 이분법을 넘어서는 변증법적 관계 및 대화가 필요하다(『프레이리에게 변혁의 길을 묻다』, 심성보).

셋째, 경쟁과 협력의 균형이다. 학생 간 경쟁의 현실에 대하여 경쟁을 옹호하는 입장과 거부하는 입장 간의 논쟁이 뜨겁다. 경쟁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부족한 재화를 차지하기 위한 적자생존의 논리를 들어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여긴다.

경쟁을 거부하는 입장에서는 경쟁을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학습되는 현상으로 본다. 경쟁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강조되는 것이며 모든 문화권에서 경쟁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경쟁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경쟁을 통하여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게 되고 이의 결과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최대의 결과를 낳는다고 본다.

경쟁을 거부하는 입장에서는 경쟁이 학생들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며 경쟁보다는 협력이 높은 성취를 위한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한다.

이런 기본 전제로부터 대립하기에 학교 교육에서 경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 어느 영역보다도 선명하게 갈린다. 이제 경쟁에 대한 운명론적 수용이나 악마론적 기피를 넘어 경쟁과 협력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접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쟁을 거부하는 입장에서도 실존하는 교육 현장의 경쟁 체제를 부정할 수 없다. 경쟁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도 경쟁이 아닌 협력이 갖는 높은 효과성을 부정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경쟁과 협력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 관계일 수 있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경쟁 문화는 신념으로 극복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경쟁을 부정하고 외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소모적이고 비인간적인 경쟁을 막고 교육적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쟁과 협력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산업화 시대 우리는 한번 잘 살아보자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묵묵히 걷던 낙타였다. 절대 빈곤이라는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권위와 의무를 받아들였던 낙타였다. 민주화 시대 우리는 사람대접을 받겠다며 투쟁하던 사자였다. 낙타의 굴종을 비판하고 부정했지만 그 이상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하고 방황했던 사자였다.

지능정보화 시대 우리는 순진함과 호기심으로 매일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아이다. 낙타와 사자를 극복한 우리는 어제를 잊고 오늘을 긍정하며 명랑과 희망과 자부심을 가지고 새로운 내일을 그려내는 아이다. 메타버스는 극강의 긍정으로 살아가는 아이의 매체다.”(『메타버스란 무엇인가』, 이인화)

메타버스의 시대.

낙타와 사자라는 어른의 시각이 아닌 호기심과 긍정으로 내일을 그리는 아이의 시각으로 우리 교육을 재설계해야 한다. 생존 경쟁과 진영 논리에 의해 수시로 흔들리는 교육의 방향타를 균형의 교육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제레미 리프킨(J. Rifkin)은 진보의 시대를 이끈 것이 ‘효율성’이었다면, 지구의 생존을 위한 『회복력 시대(The Age of Resilience)』에는 ‘적응성’에 발을 맞춰야 한다고 호소한다. 우리 교육에 대입해보면 적응성이란 다름 아닌 교육의 균형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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