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유의 교육오디세이] 50살 KEDI의 두 얼굴
[양영유의 교육오디세이] 50살 KEDI의 두 얼굴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2.08.31 1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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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양영유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특임교수,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 단국대 특임교수/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 단국대 특임교수/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앙일보 교육담당 기자 시절, 나는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연구보고서를 자주 읽어보곤 했다.

복잡한 교육 정책과 현안에 대한 연구보고서가 기자의 목마른 갈증을 해소해줄 뿐더러 새로운 취재원을 발굴하는데 유용한 길잡이 역할을 해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KEDI가 발간하는 보고서에는 논란이 많은 정부의 교육정책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외국어고 폐지 논란이 한창이었는데 외고 폐지의 당위성을 주장한 보고서가, 이명박 정부 때는 마이스터고, 박근혜 정부 때는 자유학기제의 필요성을 주장한 보고서가 잇따랐다.

박근혜 정부 때는 느닷없이 KEDI 안에 없던 기구도 생겼다. 자유학기제센터였다. 박근혜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예 센터까지 설치한 것이다.

관변 연구로 역대 정부 정책 미화

그런 현상은 문재인 정부에도 이어졌다. 논란이 많은 고교학점제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내놓더니 아예 KEDI 안에 고교학점제센터를 설치했다. 센터장과 연구원 등 인력도 대거 투입했다.

이와 같은 KEDI의 연구 성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바로 관변(官邊) 연구 아닌가. 국가 교육정책 수립을 위해 중립적으로, 독립적으로 일해야 할 연구기관의 책무가 춤을 췄다고 볼 수 있다.

KEDI는 최근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지천명(地天命)이니 풍상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KEDI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그 연원부터 보자.

1972년, 유신헌법을 추진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체계적인 교육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를 수행한다는 명분으로 한국교육개발원(KEDI) 설립을 지시했다. 유신헌법 선포(1972년 10월 17일) 전인 1972년 8월의 일이었다.

‘한국교육개발원육성법(법률 제2616호)’에 근거를 둔 KEDI는 교육개발 분야의 국무총리 산하 기타 공공기관이다. 국가교육통계센터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 기관은 교육제도, 교원, 학교운영, 입시제도, 대학평가, 학생과 학부모 정책 등을 연구하는 한국의 교육 싱크탱크 역할을 자처했다.

1972년 박정희가 지시해 설립

당시에는 교육학을 전공한 석박사가 적었고, 문교부(현 교육부)내 관료들도 그러했으니 KEDI 연구원은 빛이 났다.

1974년의 고교평준화 정책도 KEDI 연구의 산물이었고, 교육부 공무원들도 KEDI의 연구 성과물을 존중했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던 KEDI는 현재 2017년 2월 충북혁신도시로 이전했다.

KEDI에서 묵묵히 연구에 매진하는 학자들은 ‘관변’이라는 말이 억울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 연구진은 일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직의 업무, 조직의 명령체계에 따라 마지못해 연구를 하는 경우도 부인하지는 못 할 것이다.

다른 국책기관들도 물론 업무 성격이 유사할 수 있다. 정권 성향에 맞는 연구로 정책을 뒷받침해줘야 기관이 유지되니 말이다. 순기능과 동시에 역기능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다는 얘기도 하지만, 나는 교육 분야에 관한한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교육의 중요성을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교육이 정치와 정파성에 의해 춤을 추는 순간 국가의 미래인 인재 양성체계가 뒤틀리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관변 역사학자는 명단 공개 안 해

2015년 2월의 일이었다. 당시 황우여 교육부장관은 국회 업무보고 중 “본인들이 신분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며 말끝을 흐렸다.

당시 도종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을 위한 교육과정 시안 개발연구 중 역사과 개발연구진(17명)만 명단이 공개되지 않았다”고 지적하자 황 장관이 이렇게 답변했다.

“수학과와 과학과의 개발연구진 명단은 제출했으면서 왜 역사과는 제출하지 않습니까?”(도종환 의원)

“본인들의 원하지 않았고 공정한 연구수행을 위해서….”(황우여 장관)

이 일화는 정부 출연기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일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다른 연구진의 명단은 공개하면서 역사 분야는 비공개한 것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KEDI는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교육부가 발주하는 연구보고 프로젝트 중에는 관변학자들이 정권 성향에 따라 참여하고 있음을 스스로 시인한 셈이다.

싱크탱크가 아닌 ‘정책 배달자’

이런 식이라만 KEDI가 싱크탱크(Think Tank)가 아니라 정책배달(Policy Delivery) 기능에 머문다고 봐야 한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은 국가의 싱크탱크로서 개발시대의 압축성장 과정에 도움을 준 국가 성장의 기반 역할을 해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환경변화에 따른 정책 연구 수요에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기여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한국개발원 외, 2004)

KEDI가 한국 교육 발전에 기여한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한국 교육을 망치는 역할도 했다고 지적하고 싶다. 가장 큰 문제는 인력구조다. KEDI 연구원들은 대부분 교육학 석박사 출신의 학력을 갖고 있다.

이들이 진정으로 교육정책을 연구하기 위해 KEDI에 입사 한다기보다는 대학 교수로 가는 징검다리로 KEDI를 이용한다는 것이 솔직한 얘기일 것이다.

KEDI 내에서 근무하다 기회가 오면 대학으로 옮긴다. 국내 교육학과 교수 중 적지 않은 이들이 KEDI 출신인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KEDI는 교육학 교수 가는 징검다리

그러다보니 KEDI 인맥이 형성되고, KEDI 출신들이 서로 끌어주는 새로운 연(緣)이 형성된다. 교육계에서는 학연, 지연보다 ‘KEDI 연’이 더 끈끈하다는 말이 나온다.

KEDI에서 장기간 근무하는 연구원들은 사실 KEDI가 좋아서라기보다 대학 문을 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솔직한 말일 것이다. 실명을 밝히기는 곤란한 베테랑 연구원의 말을 전한다.

“사실 외국에서 박사학위 따고 귀국했을 때 대학에 가려고 했지요. 그러나 그게 어디 쉽나요.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도 있어야 하잖아요. 대학 교수로 가려고 발버둥 쳤지만, 결국 가지를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KEDI 맨이 됐지요. 나 같은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는 KEDI를 대학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로 생각합니다.”

교육개발원장이나 연구실장 등 대학과 네트워크가 강한 상사들은 그들에겐 든든한 밧줄이다. 관변 연구를 거부할 힘도, 의지도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KEDI 원장 자리다. 1972년 설립 이래 현 류방란 원장까지 15명이 원장직을 수행했다. 그런데 대부분 서울대 사범대 출신이다.

KEDI 원장은 서울대 사대 마피아

현재 생존한 원장만 살펴보자. 이돈희 원장, 곽병선 원장, 이종재 원장, 고형일 원장, 진동섭 원장, 김태완 원장, 백순근 원장, 김재춘 원장, 류방란 원장은 모두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출신이다.

서울대 출신이 아닌 사람은 18대 원장을 지낸 반상진 전북대 교수로 동국대 교육학과를 나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한 나라의 국책교육연구기관을 서울대 교육학과 출신들이 줄줄이 대물림하며 장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국교육개발원이 ‘서울대 교육학과 마피아’라는 말이 결코 농(弄)이 아닌 것이다.

이들 중에는 정치권을 오가며, 청와대를 들락거린 이들도 있다. KEDI에 잔뼈가 굵은 류방란 원장을 제외하면 전원이 국내 대학 교육학과 현직 교수이거나 명예교수이다. 2022년 가을, 대한민국 교육계가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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