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범의 교육답게] 교육을 설명하는 자, 사랑하는 자
[송재범의 교육답게] 교육을 설명하는 자, 사랑하는 자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2.08.10 1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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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재범 서울 신서고등학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2022년 8월의 시작은 뜨거웠다. 날도 뜨겁고 “초등학교 만 5세 취학연령 하향” 이슈는 사람들을 뜨겁게 만들었다.

교육부 장관의 사퇴로 일단 열기가 식은 듯 하지만, 언제라도 분출될 수 있는 마그마처럼 뜨거움의 씨앗은 심연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이 심연의 뜨거움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재난이 될 수 있고 유익한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초등학교 만 5세 취학연령 하향” 이슈를 분열의 불씨가 아닌 우리 교육 발전의 에너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뜨거웠던 모습에 대한 차분한 독해(讀解)가 필요하다.

나는 그 뜨거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읽었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취학연령을 만 6세에서 5세로 낮추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뜨거움이었다. 압도적인 반대의 분위기 속에서 찬성의 목소리가 힘을 내지는 못했지만, 찬반의 입장에서 다양한 이유들이 제시되었다.

여기서 그 이유들을 다시 정리하지는 않겠다. 다만, 교육 정책이나 현안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고 때로는 발전을 위해 논쟁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팽팽하고 치열한 논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승부로 끝났다. 좀처럼 보기 드문 사례다. 왜 이렇게 한쪽의 일방적인 항복으로 끝났을까?

두 번째는, “초등학교 만 5세 취학연령 하향”이라는 정책을 제시한 방식에 대한 뜨거움이었다. 본 정책이 발표되자 많은 학부모와 시민단체, 교직단체, 교육전문가들의 반응은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 정책으로 당혹스럽다’는 반응이었다.

대선 공약이나 인수위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내용이 어느날 갑자기 업무보고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 5세 초등학교 입학 학제개편안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김영삼 정부 이후 역대 정부에서도 검토되었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으로 실행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갑툭튀’ 또는 ‘뜬금포’로 보였을까?

첫 번째의 뜨거움이 제안한 교육 정책의 적절성에 대한 문제라면, 두 번째는 제안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언론의 보도 내용들도 이러한 두 가지 차원에서 분석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다 이번 사태의 뜨거움을 읽어내는 세 번째 독법(讀法)을 추가하고 싶다. 바로 교육을 설명하는 자와 사랑하는 자의 대비이다.

이 세 번째 독법(讀法)은 교육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한다. 이번 사태에 대해, 그리고 다양한 교육 현안이 등장할 때마다 교육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한마디씩 한다.

그때마다 그들은 교육 또는 학교에 대해 어떤 기본적인 태도 또는 정서를 갖고 있다. 나는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그들을 ‘교육을 설명하는 자’와 ‘교육을 사랑하는 자’로 구분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 교육에 대해 한마디 던지는 당신은, 교육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교육에 대한 설명이나 평가만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교육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설명하는 자와 사랑하는 자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그 구분을 세계적인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님의 글로부터 빌려와 본다.

우리에게 『통섭(CONSILIENCE)』이라는 멋진 제목의 번역본을 선물하신 교수님은, 그 번역본의 서문에서 설명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다음과 제시한다.

뇌의 진화는 대개 ‘생존의 뇌(survival brain)’, ‘감정의 뇌(feeling brain)’, ‘사고의 뇌(thinking brain)’의 세 단계로 나뉜다. 하지만 정도와 방법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뇌를 가진 동물이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사고할 줄 아는 능력을 갖췄다.

특히 영장류, 그중에서도 침팬지나 보노보에 이르면 그들의 뇌는 우리 인간의 뇌와 구조적으로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네 번째 단계로 ‘설명의 뇌(explaining brain)’를 제안하려고 한다. 다른 많은 동물들도 생각하는 뇌는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설명하고 구연할 줄 모를 뿐이다. ~~~

그래서 나는 데카르트의 언명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의 대안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narro, Ergo Sum)”를 제안하려고 한다.

지금까지의 뇌과학은 ‘생각하는 뇌’를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 ‘설명하는 뇌’는 아마 ‘생각하는 뇌’와 ‘느끼는 뇌’가 보다 긴밀하게 협조하는 관계 속에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통섭은 바로 이 ‘설명하는 뇌’의 작용이다.

그리고 교수님은 또 다른 저서 『통섭의 식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늘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을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닌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더욱 사랑하게 된다고 확신한다.

나는 최재천 교수님의 위와 같은 표현들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인다. 『통섭』의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설명하는 자’를 가리킨다면, 『통섭의 식탁』에서 외치는 “알면 사랑한다!”는 ‘사랑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의미를 내 멋대로 다음과 같이 확대해본다. 설명하는 자는 어떤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대상을 알려고 하지만, 사랑하는 자는 어떤 대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대상을 알려 한다고.

그리고 알면 알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고. 그 대상이 교육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을 설명하는 자’는 교육을 설명하기 위해서 교육을 탐구하지만, ‘교육을 사랑하는 자’는 교육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육을 탐구한다고.

그리고 교육에 대해 제대로 알면 알수록 교육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교육에 대한 사랑보다는 설명만이 넘쳐난다. 이번 “초등학교 만 5세 취학연령 하향” 논쟁도 마찬가지다. 이 논쟁의 관련자 또는 참여자 중에서 나는 ‘교육을 설명하는 자’와 ‘교육을 사랑하는 자’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 구분이 나의 주관적인 감정이 아니냐고 공격당할 수도 있지만, 교육을 사랑하는 나의 입장에서 볼 때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번 논쟁의 허무한 승부를 낳은 원인이 정책 제안자의 논리나 설명 부족보다는 다른 곳에 있다고 본다. 바로 정책 제안자에게서 ‘교육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듯이 교육 현장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접근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지친 현장을 보듬기보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역할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교육에 대한 설명보다 사랑이 필요한 시기이다. 교육부 장관을 포함한 새로운 교육 당국자들은 교육을 설명하기보다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 현장을 분석, 평가, 지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여겼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풀꽃」(나태주)의 시어(詩語)처럼 교육을 더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아야 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교육도 그렇다.”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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