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범의 교육답게] 허준이 그리고 변별력
[송재범의 교육답게] 허준이 그리고 변별력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2.07.19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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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재범 서울신서고등학교 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2022년 7월 교육계는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프린스턴대학 교수 이야기로 뜨겁다. 우선 수상에 대한 축하와 기쁨으로 뜨겁고, 우리 교육에 대한 언론의 분석과 칼럼들이 뜨겁다.

그런데 그 뜨거움만큼이나 감흥은 별로 없다. 언론의 많은 주장들이 너무나 자주 보아온 거의 공식과 같은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한국인들이 어떤 분야에서 큰 상을 받거나 공헌을 했을 때, 현재 한국의 교육 시스템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투의 이야기이다.

이번에도 문제풀이식 한국 수학 교육의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입시에 종속된 한국 교육시스템의 문제가 어김없이 지적된다.

「입시 갇힌 수학 교육 제2 허준이는 없다」는 기사 제목이 우리 교육에 대한 패턴화된 자학(自虐)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도돌이표 같은 지적과 반성에 큰 감흥도 없고, 이런 반성이 우리 교육의 체질 개선으로 곧장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드물다.

왜 감흥과 기대가 없는 것일까? 이미 다 알고 있는 문제이고 별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삐뚤어진 우리 교육 문제의 뿌리는 입시[특히 대입]에 있고, 그것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칼에 해결할 수 없음을... .

입시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현실 앞에서, 허준이 교수가 인터뷰와 강연을 통해 던진 여유, 자유, 창조, 수학의 즐거움 같은 단어들은 공허하기만 하다. 이런 헛헛함을 가져온 주범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변별력의 늪에 빠진 수능 문항’이 떠올랐다. 물론 이것도 결코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교육부의 「학교생활기록 작성 및 관리지침」(교육부 훈령 제393호, 2022.3.1.)에 따르면 “지필평가 문제는 타당도, 신뢰도를 제고할 수 있도록 출제하고…”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하여 만들어진 각 시도교육청의 「학업성적관리지침」도 대부분 이 기조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수능시험 문항부터 학교시험 문항까지 타당도와 신뢰도보다는 변별도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여기서 교육학개론 기초로 돌아가서 평가 문항에서의타당도, 신뢰도, 변별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자.

타당도는 원하는 것을 제대로 된 방식으로 측정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학생의 지능을 측정한다고 하면서 줄자로 머리둘레 길이를 잰다면 제대로 된 방식이 아니다. 타당도가 없는 측정 방식이다.

신뢰도는 검사나 시험의 점수가 얼마나 일관성을 갖느냐는 것이다. 키를 세 번 측정했는데 첫 번째는 165cm, 두 번째는 170cm, 세 번째는 175cm가 나온다면 측정치 간에 일관성이 없다.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변별도는 시험 문항이 성적이 높은 학생과 낮은 학생의 실력 차이를 제대로 구별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떤 시험 문항에 대해 상위집단의 정답률이 하위집단의 정답률보다 높았다면 변별도가 있는 문항이 되고, 차이가 없다면 변별도가 없는 것이 된다. 문항이 너무 쉬울 경우 변별도가 떨어진다.

교육학개론에 나와 있는 이 상식적인 내용을 왜 다시 확인해야만 하는가? 이 상식이 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의 학력고사에 대비하여 수능시험이 갖고 있는 장점에 대한 찬미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수능시험에 요구하는 것은 타당성이나 신뢰도가 아니라, 학생들의 성적 서열화를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변별도를 갖춘 시험 문항, 즉 변별력을 요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시험국민의 탄생』(이경숙)의 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처럼, 시험 문항의 타당성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은 오히려 변별력을 물고 늘어졌다.

“중일전쟁 무렵 일제가 중등학교 입학 구술시험에서 냈던 문제들이 지금 보면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질문이 분명한데도, 당시에는 누구도 시험 문제가 타당한가, 라고 묻지 않았다. 지금도 평가가 물어야 할 내용을 묻는가 하는 타당성은 전문적 영역이라 밀쳐두고 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타당도를 제외하고 객관성, 공정성, 변별력 중 무엇 하나라도 어긴다면 그 평가는 순식간에 논쟁에 휩싸이고 살아남지 못한다.”

변별력이 시험 문제의 핵심 논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었다. 당시 응시자 85만명 중 66명이 만점을 받자, 언론은 ‘물수능’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듬해 어려워진 시험은 ‘불수능’이라 질타받으면서, 이제 수능 시험 성공의 열쇠는 시험 문항의 타당도나 신뢰도가 아닌 변별력이 되어버렸다.

대학 서열화가 심해질수록 변별력 요구도 더욱 커졌다. 학생들의 종합적 사고력을 평가할 수 있는 타당성 높은 문제보다도, 대학의 이름값에 맞게 학생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순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시험 문항을 요구했다. 이 적절한 변별력의 달성 여부에 따라 수능시험을 주관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의 직위 유지가 결정되기도 했다.

어느새 수능시험 문항의 최고 가치가 되어버린 변별력. 물론 시험 문항이 선발 기제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변별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수능 문항은 의미 있는 변별력, 즉 타당도 있는 변별력이 아닌 무지막지하고 억지스러운 변별력의 칼을 휘두르고 있다.

변별을 위한 킬러 문항이 그 극단에 있다. 오싹한 킬러라는 단어를 우리는 국가가 관장하는 시험에서 공공연하게 사용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킬러 문항은 시험 문항이 아니라 그냥 킬러다. 학생들의 사고력, 창의력을 죽이는 킬러다. 꿈을 죽이는 킬러다. 제2의 허준이가 될 수 있는 싹을 죽이는 킬러다.

나는 변별력(辨別力)이라는 사전적 의미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국어사전에 변별력은 ‘사물의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가리는 능력’으로 정의(定義)되어 있다. 辨(분별할 변)은 죄인 둘이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는 모습 중간에 刀(칼 도)가 들어가서 둘 사이를 칼로 자르듯이 잘잘못을 판가름한다는 뜻이다. 영어의 변별(discrimination)도 죄(crime)를 식별(discern)한다는 의미다.

왠지 부정적이다. 그냥 공부 잘하는 학생과 부족한 학생에 대한 구별 정도로만 여겼던 단어가 옳고 그름, 좋고 나쁨, 그리고 잘잘못을 구별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니 섬뜩하기만 하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옳고 좋으며, 부족한 학생은 그르고 나쁘다는 말인가?

교육은 변별이 아니라 평가이어야 한다. 변별이 학생들을 갈라치기하는 것이라면, 평가는 학생의 잠재적 가치(value)를 밖으로(e) 끄집어내어 헤아리는(evaluation) 것이다. 변별과는 다르게 긍정적이다.

선발을 위한 기능으로 수능시험에서 변별력을 요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교육적으로 요구되는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을 평가하는 수단이지, 변별력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변별의 방식이 학생들의 창의력과 탐구력을 억압하고, 수업개선 노력을 좌절시키는 굴레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정의와 공정성이라는 구호 아래 교육의 타당성보다는 기계적 변별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들』(성열관)의 저자는 “언제나 수업을 바꾸려는 행위는 변별 시스템으로서의 학교를 바라보는 사회와 대결을 벌이는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경계하고 있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이 훌쩍 지났지만, 교육부의 존재감이 어디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억지로 떠맡겨진 산업인력 양성, 유아 보육도 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와의 대결을 각오하고서라도 왜곡된 변별력의 늪에서 교육을 끌어내는 것, 이것이 교육부가 해야 할 일이다. 교육부의 존재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2의 허준이를 키우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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