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현의 독서칼럼] 절대고독을 극복한 시인
[신호현의 독서칼럼] 절대고독을 극복한 시인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2.06.08 22: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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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호현 서울배화여중 교사 - 안서경의 '유독 그곳만 환한 볕마루'
안서경의 '유독 그곳만 환한 볕마루'

고독하지 않고 글을 쓴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늘어놓는 가식이다. 애벌레는 나비가 된다는 꿈에 본능처럼 자신 안에 충만한 에너지로 고치를 틀고, 거미는 먹이를 잡아야 사는 포식본능에 자신 안에 가득한 거미줄로 그물을 친다. 시인이 글을 쓰는 이유는 어쩌면 위에 두 가지 경우를 포함할 지 모른다.

시를 통해 또다른 존재로의 비상을 꿈꾸기도 하기에 자신을 고치 속에 스스로 가두고 그 안에서 숨쉬는 것조차 아끼는가 하면, 거미처럼 커다란 그물을 치고 누군가 걸려들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고독을 풀어가려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시집은 그 안에 자신의 내면적 언어를 가둔 커다란 고치이기도 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픈 시인만의 포식 그물이기도 하다.

창세기에 보면 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각기 독립된 완벽한 인간이었을까? 하와를 만드시고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 개개인으로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에 보면, 역시 태초의 인간은 남녀가 하나였다고 한다. 하등동물처럼 자웅동체였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보면 제우스가 헤르마프로디테를 잡아다가 남자와 여자로 나눠놓았다고 전해진다. 인간이 둘이 모여 있으면 제우스를 능가하는 능력으로 제우스에게 도전할까봐 갈라놓았다고 전해진다.

하나였거나 둘이라도 완전하지 않아 늘 고독하게 사는 존재가 곧 인간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고독을 '절대고독'이라 하는데 시인들은 이런 절대고독을 시로써 승화시켜 아름다운 저마다의 집을 짓고 사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절대고독을 엮어 '고치'나 '거미줄'처럼 형상화된 것이 시집이 아닐까 한다.

안서경 시인의 시집 '유독 그곳만 환한 볕마루'라는 시집을 받아들고 보니 다른 그곳이 어디일까 궁금해졌다. 그곳은 협소한 곳이고, 햇빛이 들어 환한 곳이라면 다른 곳은 어둡고, 외롭고, 넓은 공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시인은 그곳이 '시의 볕마루'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결국 안 시인은 현실에서 숙명처럼 주어지는 삶은 어둡고, 외롭고, 쓸쓸하게 버티면서 살았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했다. 어렸을 때 보았던 햇빛이 드는 따스한 볕마루를 생각하면서 현실을 견디어 냈을 것처럼 보인다.

1994년에 1집을 출간하고 시인 안에 시들을 감추고 있었으니 분명 고치였을 것이다. 거미줄이었다면 자기 몸집의 수백 배나 되는 거미집을 지어 날개 달린 행인이 걸려들어 비실거리길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안 시인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안으로만 안으로만 독백처럼 되새김하던 언어를 예쁘게 묶어냈으니 축하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을 들여다 보자. 안 시인이야말로 시를 통해 '절대고독'을 노래하고 있다. '외로움도 오래 가져 노니 방울방울 사리가 되더라 / 쓸쓸함도 오래 가져 노니 옴큼옹큼 새가 되더라' (중략) '희망 대신 바램 대신 외로움의 사리 녹여 방울방울 시를 쓴다'(98쪽, '마음 속에 집을 짓고'의 부분)에서 '외로움', '쓸쓸함'이 '사리'가 되고 '새'가 되고 마침내 '시'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니, / 묻기도 전에 / 너는 다시 포로롱 날아간다' (중략) '다음 생의 언약이라도 해 두자는 건지' 어쩌면 시인의 '절대고독'은 함께하여야 할 대상이 새처럼 날아 '다음 생'을 향해 날아간 이유가 아닐까?

시인이 왜 그렇게 힘들어 했을까 시집 속에서 비집어 찾아보았다. 의외로 찾기 쉬웠다. '두 물이 사무쳐 / 서로의 등허리를 허무는 / 양수리 두물머리'(16쪽, '두물머리에 머물다'의 부분) 필자도 두물머리에 가 보았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모여 사랑을 이루는 두물머리라 생각했는데 시인은 '서로의 등허리를 허무는'이라고 노래했다.

어쩌면 시인은 이생에 '기억의 잔뼈'들을 양수리 물결 속에 뿌리지 않았을까. 그래서 시인의 어둠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만 꽃의 최후를 보고서야 말았다'(17쪽, 해바라기 조문'의 부분) 해바라기처럼 밝고 커다란 꽃이 '목째 부러진 해바라기'의 모습이 되었을 때 시인의 희망도 같이 부러졌을 것이다. '생의 봄도 그렇게 고속열차를 타고 달아난다고 / 조금만 더 길게 붙들어 두라 말해둔들'(18쪽, '봄은 외출중'의 부분) 그리고 시인의 봄은 그렇게 '외출'했을 것이다.

시인은 모든 것을 접어 미국으로 떠났을 것이다. 폭풍 같은 현실에 자신을 내던지면 고독도 슬픔도 함께 잊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내던져진 현실은 그저 어지럽게 흔들렸을 것이고 눈을 꼭 감고 두 아들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 가만 눈을 떴을 때 보여진 언덕에는 시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슬픈 덩어리를 뜯으며 왜 이것이 나의 시인가를 생각했다'(70쪽, '명태를 뜯으며' 부분)에서 '슬픔 덩어리' 같은 '명태'도 '시'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생력을 찾아내고 있다. '봄날 고궁 쪽으로 부어진 햇살이 / 심상치가 않다 / 조명등처럼 유독 그곳만 환한 볕마루다'(25쪽, '고궁에 기대어'의 부분) 시인은 고궁의 세월도 결국 잠깐인 삶의 경지를 깨닫고 다시 '시의 볕마루'를 통해 삶의 이유를 찾았을 것이다.

외롭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고독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어린 아이들은 게임을 하면서도 '심심하다' 하고 어른들은 '고독하다', '한가하다'라는 말로 자신의 외로움을 실토하고 있지 않은가? '절대고독'은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것이다.

나무가 외로워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겠는가. 동물들이 외로워서 제 짝을 찾고 새끼를 낳아 번식하는가. 외로움은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만의 본능이라 '절대고독'이라 표현했고 김현승 시인은 '까마귀'라 형상화하지 않았는가.

필자는 사람들이 '절대고독'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을 다섯 가지로 규명해 보았다. 첫째는 술을 마시는 사람, 둘째는 입술(이성 추구)을 마시는 사람, 셋째는 예술을 마시는 사람, 넷째는 종교요, 다섯째는 취미활동이다.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술에 취해 사는 삶이요, 넷째는 신에게 의지하고 다섯째는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는 삶이다.

이 다섯 가지는 독립적이기도 하지만 서로 겹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술을 마시는 사람이 예술을 즐기면서 취미활동을 즐기고 심지어는 종교에 몸을 두기도 한다. 모두가 외롭기 때문이다.

안 시인은 참으로 외롭게 삶을 살아오면서 '시를 통해 삶의 볕마루'를 보았다. 하지만 안 시인만 유독 더 외로웠다고 하기는 동의하지 않는다. 안 시인이 생각이 많고 생각이 깊어 부딪혀오는 삶의 여정에 '절대고독'을 더 향유하면서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문학을 통해 승화시킬 수 있었고 문학의 마디마디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길을 가다 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돌 하나에도 삶의 의미를 부여하여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노래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예술가라 하기에 안 시인은 참 시인이다. 남은 인생이 길다면 '유독 그곳만 환한 볕마루'에서 기쁨과 환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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