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걸 이사장, "누구보다 ‘디자인서울’을 사랑하셨던 이어령 선생님"
권영걸 이사장, "누구보다 ‘디자인서울’을 사랑하셨던 이어령 선생님"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2.03.02 19: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 권영걸 서울예술고 교장/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
이 시대의 지성으로 추앙받는 고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영결식이 2일  각계의 애도속에 거행됐다.
이 시대의 지성으로 추앙받는 고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영결식이 2일 각계의 애도속에 거행됐다.

“내가 죽으면 구더기가 나를 먹어 버릴 텐데, 마음이 바빠서 밥 먹을 겨를도 없어요...” 15년 전 이어령 선생은 오세훈 시장과 필자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밥 한술 뜨지 않으며 서울의 미래에 대해 다변(多辯)을 이어가셨다.

식사보다 한 말씀이라도 더 주고 싶은 연유를 그렇게 섬뜩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중에도 늘 삶과 죽음을 명상하는 지성인이셨다.

이어령 선생에 대한 온갖 평설이 있지만, 선생님이 디자인에 각별한 관심과 고도한 식견을 가지신 분임을 아는 사람은 적다. 사실 선생은 염보현 서울시장의 한강 정비사업 때부터 줄곧 서울에 문화의 옷을 입히는데 알게 모르게 관여하신 분이다.

이후 필자가 서울의 도시디자인을 주도할 당시에, ‘디자인서울’ 정책에 대해 많은 고담과 준론을 펼치셨고, 비범한 아이디어를 숱하게 던져 주셨다. 서울의 경관을 쌍안경적 시각으로 관찰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훈수를 아끼지 않으셨다.

한강에 대해서는 “인문학의 가치와 문화와 생명이 흐르는 강이어야 한다”고 하셨고, 남산에 대해서는 “역사성을 복원하고 자연에서 문화를 꽃 피우라”하셨다. 그러한 말씀은 한강르네상스와 남산르네상스의 디자인 이념이 되었다.

디자인서울의 일환으로 부활시킨 덕수궁 앞 수문장 교대식에 대해서도 깐깐한 비판의 말씀을 하셨다. “권 부시장! 수문장 교대식이 저렇게 화려하지 않았어요.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체면치레로 멋지게 보여주려는 욕심은 이해가 가지만, 이건 아니야...”

그는 구한말 궐문 앞 수문장과 위병(衛兵)들의 사진을 놓고 그들이 제대로 의장과 교대식을 갖출 형편이 되지 않았고, 허리춤에 새끼줄을 매고 있었던 것도 이야기해 주셨다. 그만큼 서울의 역사와 전통, 법식과 의장에 대한 지식도 방대하셨지만, 허위나 과장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치셨다.

“시청광장에서 볼 때 덕수궁 돌담은 원래 없었어. 덕수궁이 조선 역사에서 제대로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건 아관파천 뒤에 있었던 일이에요. 덕수궁 돌담에서 인위적으로 조성된 부분을 허물어 철책으로 마감하고, 서울광장에서 저 깊은 덕수궁 석조전까지가 투시되어 보이도록 야간 조명을 설치하는 것이 좋겠어... .”

선생님은 역사에 대한 거시와 미시적 통찰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문화기획까지 함께 고민하며 필자에게 제안해 주신 것이 부지기수였다.

필자도 오랜 세월 디자이너, 교육가, 행정가, 경영자로 살아왔지만, 이어령 선생님만큼 전위적이면서 위력 있는 디자인 아이디어를 제시해 주신 분은 없었다.

그의 탁월한 안목과 상상력, 날카로운 분석력 덕분에 서울디자인올림픽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서울은 최초로 ‘세계디자인수도(WDC)’에 등극할 수 있었다.

또 2010년에는 세계 8번째로 유네스코가 선정하는 ‘디자인 창의도시’로 지정되었다. 그 밖에도 광화문광장, 서울성곽 등 수많은 서울의 명소에 대한 선생의 애정은 지극하셔서,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으로 일하는 동안 선생님의 훈수는 계속 이어졌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생전에 권영걸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서울예고 교장)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권영걸 이사장 측 제공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생전에 권영걸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서울예고 교장)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권영걸 이사장 측 제공

역사적 조상(彫像)은 늘 관료들과 목소리가 높은 보수 강단 사학자들에 의해 고루한 형태로 귀결되기 마련인데, 광화문의 세종대왕상도 예외가 아니다.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은 세종대왕상을 지상이 아닌 지하에 조성하여 한국인이 가장 존숭하는 임금님에 대한 예(禮)를 다해야 한다고 하셨다.

석굴암 형식이 떠올려지는 이 아이디어는 범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군왕의 상(像)을 비바람 몰아치는 노천에 세우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는 진부하고 관료적인 기존의 세종대왕상을 볼 때마다 선생님의 아방가르드한 신세기적 발상이 오버랩 되어, 아쉬운 마음으로 가슴을 쓸어내린다.

선지자의 뜻은 대개 받아들여지지 않는 법, 선생의 유실된 아이디어가 한둘이 아니다. 선생께서 한 때 난지도 일대의 개발위원장 직을 맡아 그곳에 ‘천년의 문’을 세우려다가 실패한 쓰라린 경험도 있었다.

선생은 동 시대의 모든 매체를 통해 국민을 각성시켰다. 잠시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셨지만, 사실 평생 대한민국의 문화 지형을 성형하신 분이다.

한국인은 선생님을 통해 자기 발견이 가능했고, 문화적 자존의식이 일어났다. 지면을 통해서, 또 지면 밖의 세계에서 전방위적으로 우리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람들은 선생을 언어의 마술사라고 칭송하는데, 사실 그것처럼 선생님의 경지를 깎아내리는 말이 없다.

선생은 언어 기술자가 아니라 개념을 주조하시는 분이고 시대정신을 견인하는 방향타와 같은 분이셨다. 일상의 언어 속에 잠재된 일제 잔재를 청소하시는 한편, 우리 한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뜻에 얼마나 정연한 논리를 담고 있는지를 알게 하신 분이다,

지식인들에게도 생경한 노견(路肩)이란 용어를 갓길로 바꾸신 것뿐인가? 선생님이 순수 우리말로 명명해주신 따뜻하고 말끔한 용어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에 필자가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은 디자인에 대해서도 석학이신 선생께 오래 전부터 ‘디자인’의 순수한 우리말을 받고자 했는데, 기회를 잡지 못하고 부음을 듣게 된 것이다.

디자인은 지난 반세기가 넘도록 도안, 의장 등으로 번역되었고, 중화문화권에서는 설계(設計)로 통일되어 있으나, 모두 우리의 언어관습과 맞지 않고, 그 낱말들의 용례 또한 현대디자인의 확장된 의미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선생님의 영전에서 받아낼 것을 못 받아낸 넋두리를 하고 있자니, 선생님께 한 점 드릴 것도 없었고 드리지도 못했던 불충이 가슴에 사무친다.

89세의 뜨거운 생애에 존경을 드리며, “죽는 것은 돌아가는 것, 내가 받은 모든 게 선물이었다”고 말씀하신 선생님! 돌아가신 그곳에서 편히 안식하소서... .

※ 필자 권영걸 = 전 서울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 서울대 미대 학장, 계원예술대학교 총장, 현 서울예술고등학교 교장, 동서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