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범의 교육해체] 환대의 교실, 그립다
[송재범의 교육해체] 환대의 교실, 그립다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0.04.01 1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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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재범 서울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장
송재범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장
송재범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장

개학이 또 늦춰졌다. 코로나19는 개학을 늦춰놓았을 뿐 아니라 「온라인 개학」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탄생시켰다. 또한 카뮈(A. Camus)의 소설 『페스트』를 스테디셀러에서 베스트셀러로 등극시켰다. 카뮈는 『페스트』를 통해 전염병 장기화로 사람들의 영혼이 황폐해지는 것을 걱정했다.

절망한 시민들은 오로지 질병 종식에만 매달려 정상적인 사고력을 잃는다. 관심이 획일화되고, 타인을 향한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감정 던지기가 판친다. 답답한 나머지 날씨에 따라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노예상태’가 되어간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지금 우리의 상황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3월이 ‘답답함’이었다면, 이제 4월은 ‘잔인함’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답답함이나 잔인함보다 더 걱정되는 것이 사람들끼리 서로 던지는 혐오다.

“중국 검색하면 감염, 공포 … ‘짱깨’ 표현 사흘 만에 31배로”라는 한 신문의 헤드라인이 보여주는 것은 특정 국가나 민족을 향한 혐오다. 타국(민)에 대한 이러한 혐오는 우리 사회 내부로 들어와서 우리끼리의 다양한 혐오를 양산한다.

이러한 혐오의 모습은 학교 현장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날 것이다. 등교 개학하여 학생들이 만났을 때, 코로나19의 확진자였다가 완치자가 된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은 자신의 그러한 병력(病歷)을 쉽게 밝힐 수 있을까? 그 학생은 자신의 고유 이름보다 ‘확진자 몇 번’이라는 이름으로 친구가 아닌 혐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건 나쁘다. 그래서 타자를 함부로 혐오해서는 안된다고 모두 말한다. 그러나 혐오가 나쁘다는 사회적 합의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양한 혐오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혐오가 증가할까?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혐오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첫째 원인의 당연한 결과로서, 사람들이 혐오 행위를 하면서도 자신을 혐오 행위자(?)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혐오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등교 개학 후 교실에서 반갑게 만난 학생들이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는 혐오 행위자(?)가 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

혐오. 한자로는 ‘싫어할 혐(嫌)’에 ‘미워할 오(惡)’를 쓴다. 한 마디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이다. 영어로는 구토를 유발하는 싫은 감정을 뜻하는 ‘Disgust’가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하여 ‘혐오스럽다’고 표현할 때 갖게 되는 일차적이고 생리적인 반응을 말한다.

혐오 연구의 대가인 심리학자 로진(P. Rozin)에 따르면, 혐오는 어떤 대상이 자기 몸 안으로 들어와 자신을 더럽힌다는 느낌과 이어져 있다. 혐오란 오염원이 신체의 경계선을 넘어 몸 안으로 침투한다고 느낄 때 극대화된다.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은 혐오를 ‘원초적 혐오’와 ‘투사적 혐오’로 구분한다(Martha C. Nussbaum, 『혐오와 수치심』, 『혐오에서 인류애로』). 배설물, 콧물, 시체, 진액, 썩은 고기, 구더기, 바퀴벌레 등을 보거나 만질 때, 실제 감염 위험이 있을 때 나오는 직관적 반응이 원초적 혐오다. 이런 직관적 반응을 특정 집단에 투사하여 흑인, 여성, 유대인 등 특정 집단이 이런 오염원의 속성을 갖고 있다고 덮어씌우는 것이 ‘투사적 혐오(Projective Disgust)’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박 사장의 아들 다송이는 기택 가족의 냄새를 가장 먼저 알아챈다. “둘이(기택과 충숙 부부) 냄새가 똑같애. 제시카 선생님(딸)한테도 비슷한 냄새가 났어.” 다송이는 같은 냄새가 난다고 알아차리지만 그 냄새로 경계선을 만들지는 않는다. 이와 달리 아빠 동익은 기택의 냄새로 경계선을 만든다.

기택의 냄새는 ‘오래된 무말랭이 냄새’ ‘행주 삶을 때 나는 냄새’ ‘지하철 타는 놈들 특유의 냄새’다. 냄새라는 속성이 특정한 집단에 투사되면서 그들을 다른 집단과 구별하는 투사적 혐오가 나타난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상대를 역겨운 속성으로 환원해버리고 ‘타자는 더럽고, 나는 깨끗하다’는 이중의 망상(Delusion)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누스바움의 지적이다.

혐오 감정은 왜 이렇게 쉽게 투사가 될까? 왜 오염물에 대한 감정으로 그치지 않고, 확장된 차별의 모습으로 나타날까? 이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아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우리 모두 투사적 혐오라고 여겨질 수 있는 불합리한 혐오적 사고를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은가?

혐오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혐오는 나쁘니까 혐오하지 말라고 탈혐오의 당위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무기력하다. 학생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요구의 저쪽에는 ‘진실을 말하라’는 적극적 행위 지침이 자리잡고 있다. 마찬가지로 ‘혐오하지 말라’는 요구의 저쪽에도 ‘~을 하라’는 적극적 행위 지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혐오가 줄어들 수 있다. 여기서 나는 탈혐오를 향한 적극적 행위 지침으로 김현경의 「환대」를 떠올린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2015)에서 사람을 관계와 사회 내에서 ‘장소성(Place, Position)을 추구하며 성원권을 놓고 인정 투쟁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사람과 인간은 다르다. 사람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됨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환대란 타인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리를 준다/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딸린 권리들을 준다/인정한다는 뜻이다. 결국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권리가 인정되는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리의 의미는 중의적인데, 하나는 자리잡고 살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직위 또는 지위다.

이에 따른다면, 중국 우한에 고립되었던 국민이 귀국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한때 그들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돌아와서 생활하고 치료할 공간을 내주지 않으려 했고, 우리 국민이라는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빠른 시간 내에 환대로 바뀌긴 했지만, 처음에는 환대하지 않았다.

김현경은 데리다(J. Derrida)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절대적 환대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절대적 환대의 한 유형으로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가 있다. 이것은 모든 인간 생명은 출생과 더불어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태어난 생명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 생명이 살 가치가 있는지 (더 이상) 따지지 않는 것”이다.

“타자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가치에 대한 질문을 괄호 안에 넣은 채 그를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타자는 이러한 절대적 환대의 방식을 통해 비로소 사람이 되고, 도덕적 주체가 된다.

등교 개학 후 학생들이 다시 만난 교실의 모습은 어떨까? 김현경이 상상하는 절대적 환대의 모습이 상영되는 극장이 될 수 있을까? 다음의 표현에서 보듯이, 일단 현재 학교의 모습에 대한 김현경의 평가는 박하다.

“학교는 겉으로는 존중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경멸을 가르친다. (……) 지금 아이들은 사회에 나갔을 때 꼭 필요한 두 가지 기술―경멸하는 법과 경멸에 대처하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학교는 경멸과 혐오의 공간 아닌 환대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학교에서 나타나는 학생들의 혐오적 행동이나 표현들을, 특정 학생의 개인 일탈 행위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소위 문제아로 지칭되는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이 교실에 그대로 투영된 학생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

김현경이 “마치 어른들이 입 밖에 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의 진실을 아이들이 연극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고 표현한 것처럼, 교실은 우리 사회의 복사판이다. 혐오를 특정 개인의 일탈 행위가 아닌,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혐오가 교실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교실사회학 관점에서 보아야, 교실의 혐오에 대한 바른 인식과 대책을 수립할 수 있다.

둘째, 혐오를 넘어 환대를 위한 교육 전략으로 ‘지평 넓히기’를 제안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우리는 인간의 동물성, 불완전성, 필멸성을 끌어안아야, 혐오를 넘어 서로 연대하고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이때 단순히 타인의 처지를 ‘존중’한다는 형식적 존중에 머물러는 안 된다고 말한다. 형식적인 존중을 넘어서 타인의 심리적 상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가는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누스바움은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누는 인간 본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 경계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인류 전체를 ‘내집단’으로 포괄하는 세상을 꿈꾼다. 한 마디로 ‘지평 넓히기’다. 이러한 공존을 위한 ‘지평 넓히기’가 다양한 교육 전략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혐오는 혐오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혐오의 자리를 학생들이 서로 반갑게 만나고 인정해주는 환대로 채워야 한다. 그리고 환대를 위한 ‘지평 넓히기’ 공간으로서의 교실이 학생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3월의 답답함, 4월의 잔인함을 벗어나서 5월의 반가움이 기다려진다. 환대의 교실,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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