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주 칼럼] 어느 교사의 고백, 나는 왜 집회에 나가야만 했나
[송은주 칼럼] 어느 교사의 고백, 나는 왜 집회에 나가야만 했나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3.08.06 11:1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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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은주 교육칼럼니스트
송은주 교육칼럼니스트
송은주 교육칼럼니스트

핸드폰 날씨 앱이 현재 기온 34도, 체감기온 37도를 가리키는 8월의 한낮이었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에 앉아있으면 화상을 입고 돌아간다는 말에, 두꺼운 방석과 생수, 챙길 수 있는 준비물을 최대한 챙겨 나왔다. 광화문 거리에 앉기까지, 그리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3주 차를 맞은 집회의 주제는 교육권 확보, 슬로건은 “서이초 진상 규명을 촉구한다/아동학대처벌법 개정하라/일원화된 민원창구 마련하라/수업방해 대응체계 마련하라”였다.

7월 19일, 하루 늦은 뉴스가 전해졌다. 비보라는 말도 그 크기를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만큼 충격이 컸던 날이었다. 고인의 얼굴도 모르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아팠다.

한동안 나를 침잠하게 했던 이 아픔은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날 생각으로 교대 시절을 보내고 치열하게 공부하고 설레며 교단에 섰을, 나도 보냈던 그 청춘에 대한 비탄이었다.

얼마나 기대하고, 각오하고, 애썼고, 설렜고, 인내했을까. 교단에 설 때까지 먹었던 마음, 교단을 떠날 때까지의 마음은 밝음과 어두움이 이렇게 교차했을 것이다.

교사가 될 것을 생각하면서 어두움까지 알지 못한 채 꿈만 꾸는 사람은 현시대에는 없으리라. 사회에서 접하는 뉴스나 교사 양성 교육 내용만 고려해도 “존경받을 것이라는 환상에 맘 여린 분이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

이렇게 교사의 죽음을 개인의 문제로 귀결시키려는 시선을 돌려, 현실을 바로 보라고 외치고 싶었던 것이 집회에 나간 첫 번째 이유이다. 한 명의 죽음만 봐서는 사회 문제라 할 수 없다면 얼마나 많은 이가 같은 이유로 목숨을 잃어야 하는가.

집회에 나간 두 번째 이유는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다.

필자는 졸저 《나는 87년생 초등교사입니다》에서 조선 시대 관학의 몰락을 들어 “교사가 바로 설 수 없는 곳에는 교육도 바로 설 수 없음을 역사는 알고 있다”고 썼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조선 시대 관학의 몰락에 대하여 ‘교사에게 도덕적인 책임과 부담은 엄청나게 지워놓고 처우와 대우는 열악한 수준에 머물러 학교 교육은 유명무실해졌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갔다’고 설명했는데 그것이 꼭 우리 사회의 모습과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막 교단에 들어선 후배가 진로를 고민하면 언젠가부터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지 못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퇴직은 이제 명예퇴직을 고려하는 선배교사들만의 이슈가 아니다. 최근에는 2-40대 교사 중 상당수가 이직이나 퇴직을 현실적으로 고려한다는 현실을 절감하고 있다. 꽃 같은 후배 교사가 세상을 떠난 후 1-5년차 후배들에게 안부 차 연락하니, 벌써 주변에서만 두 명이 그만뒀다 하는 후배교사도 있었다.

20대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주변 동료들의 퇴직과 병휴직의 증가를 체감하는 정도가 내가 20대였던 10년 전보다 더 큼을 느낄 수 있다. 사유는 악성 민원과 통제되지 않는 학생 지도로 인한 우울증인 경우가 많다.

한창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적극적으로 교사의 일을 배워나가야 하는 후배가 미래를 고민할 때, 관학의 몰락을 떠올리는 나는 지나치게 비관적인가. 이토록 많은 젊은 교사가 교단을 떠나려 한다는 점을 사회는 두려워해야 한다.

저연차 교사의 문제인 것처럼 치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년을 앞둔 선배 교사까지 있는 옛 동학년 모임 8명 중 절반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거나 받았다면, 경력이 비슷한 30대 초등교사 동료 중에 정신과에 다니는 이들이 열 손가락이 된다면, 이 사실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지난 몇 년간 더 희망이 없다고 느꼈던 이유는 공교육 교사를 혈세를 낭비하는 존재로 여기는 듯한 세간의 멸시적인 시선이었다.

사회적으로 신뢰받지 못하는 직업군에 속해있다는 비애감. 내가 속한 조직이 나를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는 학습된 무력감. 나 역시 고마운 학생들과 학부모에 대한 마음을 고이 간직한 채, 동료들과 더불어 퇴직일을 조용히 헤아리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게다가 교사집단은 소위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이 자라서 된 어른’이라고들 한다. 교육청이나 정부에 크게 반기를 들지도 않으며, 초아의 봉사 정신으로 공직자다운 대국민 서비스와 스승으로서의 면모까지 완벽하게 갖추기를 요구받는 존재들이다.

교사들은 공헌감이 특히 중요한 사람들이다. 누군가의 삶에 공헌하기 위한 일을 하며 그런 기쁨도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공헌하고자 하는 선의를 지나치게 이용할 때, 그것은 초아의 봉사 정신이라는 탈을 쓴 착취가 된다.

아들러는 이를 ‘공헌감의 착취’라 했다. 권리를 찾으려는 교사에게 “교사가 헌신할 줄 모르네”, “선생님, 아이를 생각하셔야죠”라고 종용하는 것도, “당신 교사잖아.”라는 말로 회유하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대체로 순응적인 이 집단이 이렇게 많은 인원으로, 특정 단체와 상관없이 개개인의 의지로 멈추지 않는 집회를 하며 변화를 촉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관료제라는 틀 속에서 자신을 부품처럼 여기며 어느 정도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안녕한 날들에 감사하며 보냈던 직업인이 선생(先生: 8.5 집회에서 낭송된 시에서는 ‘먼저 핀 꽃’이라 표현되었다 – 문성현 교사 作)으로 다시 서보겠다며 스스로 일어선 일이다.

시멘트처럼 굳어있던 개인의 내면과 집단의 생각에 균열이 생기고 새가 태어나는 모습을 나는 떠올린다. 교사들이 교육을 포기하지 않고,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외침을, 우리의 관학은 아직 몰락하지 않았으니 힘을 보태달라는 호소를 우리 사회는 들어야 한다.

집회에 나간 세 번째 이유는 나 자신과 동료들과 우리나라에서 학생으로 사는 이들에게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정말로 포기하기 전에 말이다.

최근 3년 사이, 나는 두 명의 선배 교사가 무고한 이유로 아동학대 교사가 되어 무력하게 교단을 떠나는 모습을 목도했다. 지나치게 비관적인 나머지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학생에게 교사 A는 “그렇게 생각할 건 아닌 것 같다”고 의견을 말했는데 학생의 감정을 헤아리지 않고 정서적 학대를 했다고 아동학대 신고를 당했다.

교사 B는 수업 시간에 잦은 이탈과 방해를 하는 학생 C를 저지한 친구를 C의 부모가 학교폭력이라며 민원을 제기하여 담임교사로서 “이것은 학교폭력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는데, 담임이 학교폭력을 조장하였다며 아동학대 신고를 당했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동안 13년을 초등교사로 살면서 보호받지 못하는 동료를 보호해달라 요구하지 않고 무엇을 했는가. 나도 그 동료의 입장이었다면 담임으로서 그렇게 했을 것인데, 그랬다면 나 또한 그렇게 헌법의 기본원칙도 보장받지 못한 채 심판받을 수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무얼 했나.

매년 ‘올해 나는 다행히 괜찮은 학부모, 학생들을 만났다’ 안도하며 상처받은 동료에게는 실체 없는 위로만 하고 있었다. 이제와서 행동할 책임감을 느껴 나는 집회에 나갔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수없이 ‘그럴 뻔’한 순간들이 있었다. 신규교사 때 만났던 학생의 학부모는 쌍둥이 형제의 담임인 학년부장 교사에게 “당신 옷 벗고 싶냐”고 협박했다.

내 수업 중 학생에게 욕을 들은 적도 있다. 교사를 위협하는 순간들은 경력이나 연차에 상관없이 겪는다. 단지 어떻게 무사히 넘길 수 있었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올해는 아들이 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내 제자들이 그러하길 바라듯, 내 아이도 교권이 살아있는 교실에서 배울 권리를 즐겁게 누리는 날들을 보내길 바란다.

교육권과 교사의 기본 인권이 바로 선다고 학생의 인권이 침해되지 않는다. 인권은 공존할 때 어느 한쪽의 인권도 지켜질 수 있다. 바로 선 교사의 인권은 학생들의 인권과 학습할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집회에 나갔다. 나 외의 누군가나 어떤 단체의 압박도 없이. 내가 회피하고 착취에 순종했던 날들을 반성하기 위해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담금질을 했다. 여전히 존재하는 고마운 학생, 학부모들과 나와 내 아이, 동료들의 수업을 지키고 싶어 나갔다.

관학이 희망인 선량한 민초의 힘을 믿는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교사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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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바라는나 2023-08-09 10:47:00
조선시대 관학이 위축됐던건
사학세력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서원이 전국에 있었으니 고려때처럼 특정 교육기관의
인맥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우리도 똑같이 유학자들을 배향한다'는 공통적인 정서를
공유할 수 있었으니 자연스레 공교육기관을 대체했으리라.

배우자의 상당수가 대기업집단이나 공기업의 정규직,
명실상부한 '전문직', 동료교사, 7급이상 공무원 등인
특정직 국가공무원 집단이
어떻게 길거리의 흔하디 흔한 잡초에 빗댄 표현인
'민초'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교육현장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역할하고자 하는
산물인 공무직의 '선생님' 표현에 대해
속내를 감춘 채, 무려 학생 교육에 부정적이란 이유에서
절대 쓰면 안된다는 식의 관점을 갖고 있는 집단이.

교사B 2023-08-06 12:34:32
현재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에 대해 정확히 알고 계시기에 더욱 공감가는 기사입니다. 집회까지 참석해서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법과 제도를 정비해서 학생들과 함께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는, 더 이상 희생되는 선생님들이 없는 교실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Sirius 2023-08-06 11:42:13
“교사가 바로 설 수 없는 곳에는 교육도 바로 설 수 없음을 역사는 알고 있다”고 썼다고 하셨는데 적극 동감합니다. 지금, 여기가 제일 중요합니다. 선생님들이 이 번 일을 계기로 다시 희망을 품고 교단에 설 수 있는 기회로 꼭 만드시길 응원합니다. 대한민국을 살리는 자는 바로 선생님 여러분들입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