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학폭, 그 씁쓸함에 대하여
[기자수첩] 학폭, 그 씁쓸함에 대하여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3.03.25 16: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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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교육부·삼성·푸른나무재단 등 7개 민관 단체 관계자와 시민들이  학교폭력 방관의 탈을 벗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24일 교육부·삼성·푸른나무재단 등 7개 민관 단체 관계자와 시민들이 학교폭력 방관의 탈을 벗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에듀프레스 장재훈 기자] 학창 시절 딱 한 번 학교폭력을 경험했다. 고등학교 때 일이다. 교실 청소당번이어서 수업이 끝난 후 칠판을 지우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는 말처럼 숟가락만 놓아도 배고픈 시절이었기에 점심시간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칠판을 지우는 과정에서 분필가루가 앞줄에 앉은 친구에게 날렸던 것 같다. 느닷없이 욕설이 들려왔다. 영문을 알길 없었기에 거칠게 맞받았다. 그리고 수업이 끝날 무렵 다른 반 아이 몇이 찾아왔다.

학교 뒤편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정해진 장소에 가보니 열댓명이 모여있었다. 분필가루 때문에 시비가 붙었던 그 친구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나를 건물벽에 등지게 세우곤 빙 둘러섰다. 개중에는 제법 얼굴이 익은 아이도 있었다. 한 명이 다가와 주먹으로 가슴을 가볍게 쳤다.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일촉즉발의 순간, 저 멀리서 담임선생님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자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고 곧바로 상황은 종료됐다.

선생님은 이후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으셨다. 내 기억 속에서도 이내 사라졌다.

분필 가루가 소환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십여 년쯤 지났을 때였다. 40대가 된 어느 해 겨울 동문회에 나갔다가 그날 다툼이 있었던 친구를 만났다.

어딘가 어색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둘러쌌던 아이들이 하나 둘 보였다. 웃고 떠들다 돌아왔지만 그 후 한동안 공식 동문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수년 전 그 친구가 회사 앞으로 찾아왔다. 자기가 하는 사업에 도움 줄 만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잘 모른다고 둘러댔다. 이후에도 몇 번 연락이 왔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주먹다짐이 벌어지기 직전 뛰어오던 선생님. 대머리였던 선생님의 몇 가닥 남지 않았던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그것을 한 손으로 쓸어올리며 뛰던 모습이 지금도 또렷하다.

1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지만 단 한 말씀도 기억나지 않는데 유독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 셀 수 있을 정도다.

지인은 교육계 인사다. 20여 년 전 입시부정 사건에 연루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시험 담당이었던 그는 범인으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1년이 넘는 재판 끝에 무죄로 풀려났다.

지인에겐 어디 내놔도 자랑스런 아들이 있었다. 공부도 잘해 명문대 진학을 자신할 정도였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고 학교에 사실이 알려지자 친구들이 손가락질하며 비난했다. 왕따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당했다.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지인은 무죄로 풀려나 이후 장학관 등 고위직을 거쳐 무사히 정년 했지만 아들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학교폭력이 거론될 때마다 부들부들 떨던 그의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

교육부가 4월 초 학교폭력 대책을 발표한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강화하고 피해자 회복에 중점을 두는 대책으로 알려졌다. 학폭 조치 사항을 대입에 반영한다는 방향도 정해졌다.

경험 탓일까? ‘피해자 회복’이라는 단어에 유독 눈길이 간다. 구체적 내용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솔직히 큰 기대가 되질 않는다.

학폭 피해자의 치유가 말처럼 간단치 않다는 생각에서다. 사과한다고 뚝딱 끝나는 것도, 가해자가 대학을 가지 못했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계서는 교육적 해결을 강조한다.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교육적 해결에 기대를 거는 학부모가 얼마나 될까? 대통령이 원스트라이크 아웃을 말하고 무관용 엄벌주의가 거론되는 것은 교육적 해결의 한계를 의미한다.

학폭 사건은 교사들에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다. 사소한 다툼에도 온 학교가 비상이 걸리기 일쑤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끼어 시달리다 못해 명예퇴직을 해버린 교장, 교감 이야기도 흔히 들을 수 있다. 심지어 병원에 입원한 경우도 봤다.

가슴 한대 툭 맞은 기억도 평생을 간다. 물리적 정신적으로 시달린 학폭이라면 오죽할까. <더 글로리>에서 ‘멋지다 연진아’를 외칠 때 많은 이들이 동은이에게 마음속 응원의 박수를 보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학교폭력 피해학생 전담지원기관 현황에 따르면 전국에서 303곳이 운영되고 있다. 서울엔 단 3곳이다.

하지만 서울시교육청은 Wee센터에서도 학폭 피해자를 상담 지원하고 있다며 20여 곳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교육부 자료 조차 신빙성이 의심되는 실정이다.

전국단위 유일한 학폭 피해자 위탁 교육기관인 해맑음센터는 정순신 변호사 사건이 있기전만해도 비참했다고 한다. 붕괴 위험에 기울어 가는 강당과 기숙사는 폐쇄되고 피해학생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본교로 복귀하라는 통보까지 받았을 정도다. 이게 현실이다.

4월이면 교육부는 수백 페이지의 보고서와 수십 장에 이르는 대책, 그리고 수시로 학폭 대책 퍼포먼스를 보여줄 것이다. 관건은 가해자의 대학입시에 벌점을 줄 것이냐, 또 얼마나 줄 것이냐가 아니다. 수많은 피해자의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하는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 즉 ‘생태적 접근’이 중요하다.

반성과 처벌은 가해자의 몫이다. 제2, 제3의 ‘문동은’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몫이다, 영혼의 흉터, 학폭.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시절의 주홍글씨이기에 더 깊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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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진 2023-03-27 09:31:42
피해자 지원과 보호에 대한 생태적 접근 적극 공감합니다. 좋은 글 잘 읽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