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의 교단춘추] 교사 vs 뫼르소
[전재학의 교단춘추] 교사 vs 뫼르소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3.02.14 1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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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재학(인천 산곡남중학교 교장)
전재학 인천산남곡중교장
전재학 인천산남곡중교장

“한낮의 뜨거운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 이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 뫼르소의 말이다. 다시금 이 소설을 읽어도 심히 동정심이 유발된다. 그는 분명히 살인자다. 하지만 무언가 연민의 정으로 도와주고 싶은 인물이다. 필자는 뫼르소의 삶에서 오늘날 교사의 고통을 발견한다. 교사와 뫼르소는 둘 다 이방인이자 삶의 부조리를 몸과 마음으로 버텨내고 있다.

삶의 부조리, 카뮈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Key word)다. 이는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모두가 단절되어 있다’라는 삶의 본질적 특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사람은 모두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오래된 결론이다. 주지하다시피 카뮈는 소설 《이방인》 외에 희곡 《칼리굴라》,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쓴 작가다. 세 작품 공통으로 부조리한 삶에서 인간이 어떻게 투쟁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은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라는 핵심 명제를 전달한다. 이는 곧 현대인은 ‘소외(疏外)’와 깊이 연계되어 있다는 말이다. 현대인은 집단 속에 존재하지만 집단과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한다. 이른바 ‘함께 홀로’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외형적으로는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동료 교사들과 혼재되어 살아간다. 하지만 진심을 드러내길 회피하는 직업적 특성으로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지 못하고 이로부터 느끼는 소외감은 교사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 어쩌면 교사는 평생 낯선 곳에 던져지는 존재가 아닌가 한다.

교사는 몇 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학교를 옮겨야 하고, 매년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야 하며, 매년 새로운 업무를 해야 한다. 학교를 옮기면 학교 관리자도 신규가 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짧게는 몇 달이 걸린다. 업무 상황도 수시로 바뀌고, 해마다 새로운 것이 추가된다. 하나의 업무에 어느 정도 적응하는 단계가 되면 갑자기 시스템이나 방법을 바꾼다고 새로운 연수를 받으라 한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예측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교사는 자신의 근무지와 업무에 있어서 그야말로 ‘이방인’인 것이다.

그 밖에 교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많다. 짐작컨대 역시 ‘수업’이 가장 먼저다. 수업은 교사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그 수업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별로 준비하지 않았던 수업이 우연한 상황 전개로 반전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교사에게 수업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심해(深海)와 같다. 여기에 아이들의 유동성도 추가적인 몫을 한다. 매일, 매시간 아이들을 만나는 교사는 작년 아이들과 올해 아이들이 다르고, 같은 주제로 똑같이 수업해도 아이들이 바뀌면 그 수업은 완전히 다른 수업이 된다. 아이들이 예고 없이 찾아오는 교사의 아침 시간, 쉬는 시간, 점심 시간에 교사는 업무에도 집중할 수 없다. 그러니 교사는 본업인 수업에서도 늘 뫼르소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교사의 각종 업무는 어떤가? 이는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교사의 본업은 다른 직업처럼 일의 효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 노력한 교사는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마치 숙련된 의사, 노련한 변호사, 훌륭한 요리사처럼 말이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이를 빗대서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 교실을 박차고 나와 “선생님의 수업이 제 인생을 바꾸었습니다.”라고 말하진 않는다. 심지어 백 년을 지나도 그 효과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 교육이다. 따라서 기약이 없는 기다림은 때로는 교사가 스스로 자신의 소신을 의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수업 내용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학생, 유명 강사와 교사의 수업을 비교하는 학부모, 수업이 아닌 다른 일에 몰입하여 성과를 내는 동료 교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교사의 자존감은 크게 파도를 탄다. 그러다 보니 자기 일에 대한 소외감,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또 아이들은 교사가 수업에 쏟는 열정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동일한 근무 공간에서조차 수많은 외딴섬과 같은 존재인 동료들도 별로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사는 아이들과 동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지 못한 채 각자 교무실 한쪽 구석에서 자기의 일을 수행하는 고독한 존재다.

문제는 이러한 고통을 교사는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 자존심이 강한 집단인 교사는 도와달라는 말을 쉽사리 하지 않고 고통과 소외에 대해 철저히 침묵한다. 그러니 진심을 말할 일이 줄어든다. 뫼르소도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아 재판 과정에서 곤욕을 치렀다. 그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을 말하지 않았고 살인에 대해서도 변론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버티다가 자신을 찾아온 사제에게 그동안 숨긴 감정과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그러면서 오랜 시간 오열했다.

교사는 이런 비슷한 아픔을 겪으면서 뫼르소에 동질감을 느낀다. 자신의 고통과 진심을 숨기다가 그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절규하는 것이다. 필자는 학교 현장에서 업무적으로 베푼 작은 친절에도 쉽게 감동하고 아이들보다 더 눈물샘을 빈번하게 자극하는 교사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이런 배경과 연계하여 직업적인 특성상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상담실의 문을 노크하는 교사들이 많다. 업무를 떠나 얼굴을 마주치면서 필자가 건넨 “요즘 마음이 어떼요?”란 작은 인사말 하나에도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주절주절 말하기를 시작하면서 마치 심리적 심폐소생술을 한 것처럼 생기를 띠기도 한다.

교사는 자신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이 길이 직업적 고통을 극복하는 최선의 처방이라 믿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교사의 본업에서조차 느끼는 소외와 진정한 위로의 결핍은 오늘날 교사들을 멍들게 하고 우울하게 하며 명퇴를 재촉하는 요인 중의 큰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사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기를 둘러싼 환경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시대 영향력 있는 신경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올리버 색스(Oliver Wolf Sacks: 1933~2015)는 기억상실, 감각상실, 감각 혼동과 같은 지독한 병을 겪으면서 자기의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환자들의 이야기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을 집필했다. 여기서 교사는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많은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즉 교사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색스는 정체성을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교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교사에게 가장 큰 업무이자 동시에 가장 큰 좌절을 안겨주는 수업에 대한 두려움을 마주하는 내면아이(Inner Child)를 표현하지 않으면 교사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교사 집단 내의 소규모 그룹인 전문적 학습공동체 등에서 수업과 생활지도에 대한 각종 에피소드를 나누며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웃고, 또 울면서 상호 교환하는 다양한 표정과 대화 속에는 그동안 코로나19 시기에 묻혔던 교사들의 참모습과 힐링하는 자세가 드러난다. 이것이 교사가 뫼르소와 같이 삶의 애환과 부조리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는 슬기로운 교사 생활의 지혜로운 한 단면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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