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범의 교육說] 회복탄력성 리바이벌
[송재범의 교육說] 회복탄력성 리바이벌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1.03.12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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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범 서울 신서고등학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회복탄력성(resilience). 많이 들어본 단어다. 위키백과에는 그 사전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복탄력성은 영어 "resilience"의 번역어다. 심리학, 정신의학, 간호학, 교육학, 유아교육, 사회학, 커뮤니케이션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는 개념이며, 극복력, 탄성, 탄력성, 회복력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가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이다. 2011년 3월 《회복탄력성, Resilience》(김주환 지음)이라는 책이 우리 앞에 등장했다.

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20쇄까지 찍었다. 도대체 회복탄력성이 무엇이기에 당시 우리 사회는 그 책에 빠져들었을까?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회복탄력성의 의미는 이렇다.

▪ 회복탄력성은 자신에게 닥치는 온갖 역경과 어려움을 오히려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힘이다.

▪ 회복탄력성은 마음의 근력과 같다. 몸이 힘을 발휘하려면 강한 근육이 필요한 것처럼, 마음이 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마음의 근육이 필요하다.

▪ 회복탄력성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그 환경을 스스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는 인간의 총체적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의 ‘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가 우리 앞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뒤 정확히 10년이 지난 2021년 3월의 오늘, 회복탄력성을 다시 호출해본다. 지금 우리에게는 회복탄력성 리바이벌이 필요하다.

회복탄력성이 원래 개인에게 적용되는 용어이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이것을 확대하여 집단적 회복탄력성이 필요하다. 학교는 비정상이 길어짐에 따라 너무 지쳐있다. 전교생이 아닌 학생의 일부만이 등교하는 학교, 칸막이로 서로 막힌 채 ‘대화 금지’라는 문구를 보며 혼밥해야 하는 식사 장면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다.

회복탄력성의 힘을 빌려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지난해 3월이 혼돈의 시작이었다면, 금년 3월은 회복의 시작이어야 한다. 그런데, 회복탄력성 리바이벌을 위한 각오 앞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회복하고픈 교육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복탄력성이 원상회복의 힘을 의미한다면, 단어 그대로 원래의 모습[原狀]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 원상으로의 복귀가 이전 원상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지만, 지금의 상태는 원상의 상태와 너무 다르기에 원상의 모습에 가깝도록 회복해야 된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 단순한 과거 원상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발전적인 원상의 구축으로 나갈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회복해야 할 또는 구축해야 할 원래의 모습[원상]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원상회복의 방법을 말하기 전에 이것부터 묻고 싶다. 과연 우리에게 회복 또는 구축해야 할 교육적 원상은 있는가? 그리고 있다면 그 모습은 어떤 것일까? 압축되어 있는 용수철은 압축하고 있는 힘을 제거하면 원상으로 돌아간다. 돌아가고자 하는 원상의 모습도 분명하다.

그런데 회복탄력성을 통해 우리가 돌아가고자 하는 교육적 원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학생들의 일부가 아닌 전부가 등교하면 원상회복인가? 온라인 수업이 아닌 대면 수업이 이루어지면 원상회복인가?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대화하며 식사하면 원상회복인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교육대(사범대) 시절 배웠던 교육적 원상에 대한 희미한 기억, 바람직한 교육적 원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일 뿐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우리가 그동안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교육적 원상을 현실에서 거의 경험해보지도 못했고, 찾으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2000년대 이후로 우리 교육에 있어서 ‘그래, 바로 이게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이다’라고 만족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게 아닌데……’라며 작금의 교육 현실을 벗어나야 한다는 구호들만이 떠오른다.

원래 그리고 새롭게 추구해야 할 교육의 의미, 학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현실을 모르는 서생의 문제 제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 기회에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적 원상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자. 너무 찾지 않아 원상회복 자체가 불가능하다면 새로운 원상을 만들어보자.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를 모른 채 무조건 걷기만 하면 우리는 더욱 지칠 뿐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적 원상에 대한 합의 없이 회복탄력성을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우리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각자도생과 생존투쟁의 교육은 아니지 않는가?

이런 측면에서 교육당국에서 발표하는 신학년도 각종 계획 속에 바람직한 교육적 원상에 대한 그림은 보이지 않고, 미래 사회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만 보이는 것은 아쉬울 따름이다.

회복탄력성 리바이벌의 또 다른 과제는, 교사와 학교의 자생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교육당국의 교육정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한 육체를 위해서는 건강한 근력이 필요하듯이, 건강한 마음을 위해서는 건강한 마음의 근육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마음의 근력이 회복탄력성이다.

그리고 육체적 근력을 키우기 위해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듯이, 회복탄력성이라는 마음의 근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육체의 근력을 키우기 위해 헬스장에 가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운동을 도와주는 지원자로서의 트레이너도 있다.

이것을 교육에 비유해보면, 교육당국은 학교 현장의 교사들이 교육적 마음의 근력을 키워주도록 도와주는 헬스 트레이너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들에게

마음의 근육을 키우기 위한 충분한 공간과 시간이 주어져야 하며, 교육당국은 헬스 트레이너의 역할을 잘해야 한다. 헬스장의 트레이너는 겉으로 보면 운동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처럼 보인다. 트레이너의 감독에 따라 운동하는 사람은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소리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운동하는 사람은 트레이너에게 불만이 없다. 그런 어려운 과정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트레이너가 자신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육당국의 각종 교육정책을 보면, 이런 헬스 트레이너의 역할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근력을 키우려고 온 사람에게 꾸준한 근력 운동을 제안하거나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빨리 효과를 볼 수 있는 근육강화제나 근육강화주사를 권유하는 모습이다.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제대로 된 근육을 만들어가자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더 빨리 그리고 남의 눈에 확실한 근육이 보이도록 해주는 새로 개발한 근육강화제를 계속 소개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교사와 학교는 자생력을 키우기보다는 계속 당국의 지원을 요구하게 되고 의존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교육적 원상회복은 이러한 지원이 아니라 교사와 학교의 자생력, 교육적 근력을 키워주는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물론 교육적 원상회복을 위한 다양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것은 학교 현장의 근력을 키우기 위한 기본적이고 물리적인 조건일 뿐, 수많은 지원이 제공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근력이 키워지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근육강화주사로 인해 부작용을 가져오는 사례를 우리는 많이 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측면에서 바람직한 교육을 향한 설득과 동행보다는, 새로 개발된 근육강화제를 지속적으로 소개하는 교육당국의 보도자료가 또한 안타깝기만 하다.

따뜻한 3월이다. 교육의 회복탄력성을 키우기에 딱 좋은 날씨다. 과거로의 회복이 아니라 미래로의 회생을 위한 눈부신 햇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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