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 포기와 싸우자
[교육칼럼] 포기와 싸우자
  • 에듀프레스
  • 승인 2016.01.0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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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덕담을 이런 생각으로 대신하고 싶다.
우리 시대의 키워드 가운데 '포기'란 낱말이 어두운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다. 수포자, 영포자에서부터 3포세대, 4포세대, 심지어 N포세대까지.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얘기도 같은 맥락이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것도 아닌 주제...에, 흙수저 따위가 어디 '포기'하지 않고 경쟁에 껴드냐는 얘기다.
지난해 새로 등장한 은어들에도 이런 우울함이 잔뜩 배어 있다. 헬조선, 인구론(인문대 구십프로는 논다), 문송합니다(문과여서 죄송합니다), 지여인(지방대 여학생 인문대: 취업에 불리한 세 가지), 호모 인턴스(인턴만 하고 끝나는 청년들), 부장인턴(인턴만 오래해서 부장급이 된 청년들), 서류가즘(서류합격 뒤 느끼는 쾌감), 취업깡패(청년 실업난 속에서 쉽게 취업하는 부류들)... 모두 청년들에게 포기를 강요하는 세태가 반영된 우울한 이야기들이다.
청년들이 경쟁을 포기한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사태이다.

경쟁을 통해 자기 삶을 개선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이다. 그런데 경쟁을 포기할 때도 있다. 어떤 때에 포기하는가.
첫째, 포기하지 않으면 자신의 권리도 침해받을 수 있을 때 포기한다. 경쟁도 좋지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면 되레 나 자신의 자유를 제약당한다. 우리는 모든 자유를 다 누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자유는 포기하는 것이다. 이때는 포기하는 게 정상이다.
둘째, 외경심이 경쟁심을 압도할 때 경쟁을 포기한다. 가령 백범 김구나 마더 테레사 같은 고귀한 삶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경쟁심 대신 외경심을 품는다.이 때도 포기하는 게 정상이다.

오늘날 수포자, 영포자와 N포세대들은 무엇때문에 경쟁을 포기했는가. 경쟁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자기를 압도하는 경쟁자들에 대한 외경심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다.

오늘날 청년들의 포기는 맹목적 경쟁만능주의와 비틀린 세습 자본주의 때문이다. 이 경쟁은 출발점부터 출신성분에 의해 왜곡된, 지극히 불온하고 불건전한 것이다. 누구는 금수저 물고 조부모와 부모세대의 재력을 타고앉아 결승점 코앞에서 출발한다. 엎어지면 바로 결승점이 코에 닿는다. 반면에 누구는 흙수저 물고 출발점에서 한참 뒤진 정글 속 진흙탕에서 경기를 시작한다. 출발점에 서보기도 전에 생사를 걸고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한다. 누가 이런 경기에 기꺼이 출전하겠는가. 그래서 수포자, 영포자, N포세대가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승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포기를 낳는다. 각종 '포기'와 관련한 키워드는 한국 사회의 경쟁이 얼마나 불건전하게 왜곡돼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하나마나한 경쟁을 누가 존중하며 누가 진지하게 뛰어들겠는가. 흙수저라는 자조 밖에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건 전혀 청년세대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각종 포기 담론은, 청년들을 포기하게 만든 기성세대를 질타하는 외침이다.

청년들은 포기하기 전에, 이 경쟁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룰의 공정성을 따지는 일을 포기하면 한국 사회는 희망이 없다.
청년들은, 노력해봐야 아무 소용 없는 흙수저가 존재할 가치가 있겠는가 하는 절망을 하기 전에, 노력해봐야 아무 소용 없는 세상이 과연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포기와 싸우자. 포기하면 이 정의롭지 않은 체제를 더 강고하게 만들어주는 일에 힘을 보태는 일이 된다. 당신이 포기하면 더 많은 청년들이 더 쉽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만들어진다. 그게 포기의 악순환이다.
천박한 세습 자본주의에 좌절하지 말고 포기와 싸우자. 건강한 경쟁을 쟁취하는 게 이 사회를 살리는 길이다. 한번 좌절하면, 한번 더 성찰하고, 한번 더 항의하자. 한번 포기하고 싶은 욕구가 들면, 한번 더 세상을 향해 외치자. 비록 헬조선이라지만 우리가 살아가야 할 터전인 이 사회를 포기하지 말고, 포기의 악순환을 참여의 선순환으로 바꾸자.

병신년 새해의 다짐은 이것이다: 포기와 싸우자. 포기는 배추 셀 때 쓰는 단위로만 남기도록 하자.

출처 : 이상수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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