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범의 교육說] 교육의 배신 vs 교육의 축복
[송재범의 교육說] 교육의 배신 vs 교육의 축복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1.10.08 2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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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재범 서울 신서고등학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에듀프레스] 내가 근래 읽은 책들을 보니 유난히 <〜의 배신>이라는 제목이 많다. 가나다순으로 제목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공부의 배신> <긍정의 배신> <노동의 배신> <노오력의 배신> <수학의 배신> <실력의 배신> <열정의 배신> <희망의 배신>.

온통 배신 시리즈다. 판매 전략으로 자극적인 책 제목을 뽑은 이유도 있겠지만, 각 단어에게 갖고 있던 기대가 허물어지는 아픔을 토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도 우리가 많은 배신을 당하고 있단 말인가? 이번에 또 하나의 배신을 읽었다. <공감의 배신>이다. 아무리 그래도 ‘공감’마저 배신한다는 말인가?

저자는 말한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공감하지 말라고…. 이 책을 쓰는 목적 가운데 하나가 공감에 반대하도록 우리를 설득하는 것이라고…. 도대체 이게 뭔 소리인가? 그렇다면 저자는 왜 공감(empathy)에 반대하는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다. 그런데 스포트라이트는 빛을 비추는 면적이 좁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 많다. 공감은 지금 여기에 있는 한 사람을 도와줄 수 있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 공감은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고 근시안적이어서 단기적으로는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래에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행동을 유도한다.

◆ 공감이라는 단어에도 배신이라는 꼬리표가...

저자의 이런 논리정연한(?) 공감 반대론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거의 절대선 정도로 느껴지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이렇게도 평가될 수 있다니…. 이런 혼란 속에서 갑자기 ‘그럼 교육은?’이라는 질문이 머리를 때렸다. 공부, 긍정, 노력, 열정, 희망과 같은 바람직한 단어들 뿐 아니라 공감이라는 단어에도 배신이라는 꼬리가 달라붙는 세상이라면, 교육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 교육의 현실에서 <교육의 배신>은 누구나 한 번쯤 써 보고 싶은 책의 제목이 아닐까?

만약, <교육의 배신>이라는 책들이 출간된다면, 그 목차는 어떻게 꾸려질까? 교육으로부터 배신당한 수많은 상흔들이 처절하게 펼쳐질 것이다. 만약 내가 <교육의 배신>이라는 책을 쓴다면, 여러 상처의 지적 이전에 우선적으로 우리 교육에 배신이라는 굴레를 씌우게 만든 주요 원인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뿌리 깊은 우리교육의 현실이며, 우리가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첫째, 진영논리다.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어떤 말인지를 짐작할 정도로 우리 교육은 진영논리에 갇혀 있다. 우리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 한마디, 몸짓 하나로 어느 진영의 일원이 되어버린다. 소위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이다. 중도라는 외침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계륵보다도 못한 존재이다. 문제는 보수와 진보가 각각 주장하는 교육의 방향과 내용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태도다.

◆ 내가 만난 서울시육감 .. 인권조례 vs 나라사랑

나는 지금까지 서울시교육청 장학사와 장학관 시절 네 분의 교육감을 경험했다. 굳이 진영을 말하자면 보수 → 진보 → 보수 → 진보의 순이다. 그 가운에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내가 민주시민교육을 담당하는 팀장(장학관)이었을 때로 두 분의 교육감을 연속해서 경험했다.

진보 계열의 교육감이 교육청을 떠나는 날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송장학관, 인권조례를 부탁해요.” 여기서 인권조례란 당연히 서울시교육청에서 새롭게 출발한 서울학생인권조례를 말한다.

그 뒤를 이어받은 보수 계열의 교육감도 임기를 마치고 교육청을 떠나는 날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송장학관, 나라사랑을 부탁해요” 여기서 나라사랑이란 보수 계열의 교육감이 부임해서 강조해 온 나라사랑 교육을 말한다.

인권조례와 나라사랑, 모두 나의 팀 업무였다. 그런데 마지막 교육청을 떠나면서 두 분이 나에게 남긴 부탁은, 진영에 따라 무엇을 더 강조하고 있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나는 인권조례를 강조한 진보 계열의 교육감이나 나라사랑을 강조한 보수 계열의 교육감이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부정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업무를 처리하면서 그런 지시를 받아본 적이 없다. 각각 본인이나 진영에서 중요시하는 교육의 방향과 내용을 더욱 강조했을 뿐이다.

학교 현장의 입장에서 보면, 보수나 진보에서 요구하는 교육적 요구들이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들의 현실적 적합성 및 적용방식에 있어서 의견이 다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영의 틀에 갇혀서 상대방의 주장을 전면 부정하거나 거부한다.

◆ 교육의 진영논리는 백해 무익한 교문밖 싸움

진영논리를 극복해야 한다. 각 진영의 교육적 요구를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각 진영의 틀에 갇혀 상대 진영의 교육적 요구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배타는 학생을 위한다는 교육의 진정성을 훼손할 수 있으며, 진영의 승리를 위한 정치적 행태로 여겨지게 만든다. 정작 학교 현장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교문 밖 싸움일 뿐이다.

둘째, 아전인수다. 아전인수는 피하기 어려운 인간사회의 기본성향이다. 이러한 성격을 이해하더라도 현재 우리의 교육 정책과 교육 현장에서 나타나는 아전인수의 태도는 심각한 수준이다. 말로는 ‘모두를 위한 교육’ 또는 ‘학생을 위한 교육’을 말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아전인수격 해석이나 요구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 제 논 물대기에 바쁘다.

내가 자공고(자율형 공립고) 교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자공고 교장단과 교육감과의 간담회가 종종 있었다. 주제는 포괄적으로 서울교육과 자공고의 발전 방향 정도로 기억된다. 그런데 나는 간담회를 할 때마다 일부 교장 선생님의 발언이 불편하기만 했다. 전반적인 교육 발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고 모인 것인데, 본인 학교의 특정한 사정을 중심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교육감님, 저희학교가 위치한 지역적 여건상, 교사 배치 원칙을 재고해야 합니다.” “저희학교의 입장에서 볼 때, ○○사업의 학교별 재정지원 금액이 재검토되어야 합니다.” 학교장들이 이러할진데, 교사, 학생, 학부모들은 어떻겠는가?

◆ ‘모두를 위한 교육’ ‘학생을 위한 교육’의 허상들

우리는 대학입학 전형방식을 놓고 공론화를 벌이는 등 큰 홍역을 앓고 있다. 그런데 그 홍역만큼 과연 대입제도에 대해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있는가? 어느 한 교수가 쓴 글을 보고 나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 교수가 교양 수업에서 정시와 수시 중 어느 것이 더 공정한지 설명하라는 과제를 냈다고 한다. 백 명이 넘는 학생들의 결론은 명료했다고 한다. 본인이 입학한 과정이 더 공정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교육에서의 아전인수격 해석과 행동, 이미 거기에는 이해관계로 얽힌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없어지거나 무시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옳은 정답(正答)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답(解答)을 만들어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일반 사회의 이해관계를 풀어가는 데에 사회경제적 고려가 있다면, 교육 현장의 이해관계를 풀어가는 데에는 교육적 고려가 추가되어야 한다. 아니, 교육적 고려가 최우선이어야 한다.

셋째, 자기부정이다. 우리 교육을 걱정하고 미래의 발전 방향을 말하는 의견들이 수없이 쏟아진다. 거기에는 과거와 현재 우리 교육의 모습에 대한 반성도 함께 들어가 있다.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그 반성이 차분한 우리 교육 살펴봄이 아니라, 큰 죄를 지은 대역죄인으로 우리 교육을 취급하는 의견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우리 교육에 대한 자기반성이 아니라, 모든 교육적 노력을 일체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자기부정에 가까운 의견들이 그것이다.

◆ 우리는 <교육의 축복>을 만날수 있을까?

근래 방송을 통해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 대학 교수의 의견이 그러한 사례다. 그는 지난 우리 교육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지난 100년간의 한국 교육은 반(反)교육이다.”

“우리 교육은 단 한 번도 존엄한 인간, 성숙한 민주주의 교육을 해본 적이 없다.”

반성이 아니라 우리 교육에 대한 자기부정이다. 지난 100년간의 한국 교육이 반(反)교육이었다면, 그 교육을 담당했던 선배들과 그 교육을 받고 살아온 사람들의 100년간의 삶은 무엇인가? 지난 우리 교육을 칭찬하거나 긍정의 눈으로 볼 부분도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자기반성과 자기부정은 다르다는 이야기다. 자기반성은 잘된 것은 잘된 것대로,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반성은 자기인정의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자기부정과는 다르다. 위와 같은 자기부정에 마음이 불편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이런 자기부정적 발언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교육에 대한 평가가 ‘우리 교육이 다 그렇지’, ‘다른 교육 선진국은 이러한데, 우리는?’의 분위기로 흐르다 보면, 자기부정적 발언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나 스스로도 늘 경계하는 부분이다.

우리 교육에 대한 자기부정으로터 벗어나야 한다. 반성은 늘 할 수 있지만, 부정은 한 번으로 끝장이다. 자기를 한 번 부정해버리면 자기존재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우리 교육에 있어서의 진영논리, 아전인수, 자기부정은 <교육의 배신>을 탄생시키는 3대 숙주(宿主)다. 새로운 대통령 선거와 교육감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교육 공약에 이것에 대한 극복 의지가 배어있으면 좋겠다. <교육의 배신>이 절판되고 <교육의 축복>이라는 책이 발간되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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