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범의 교육說] '전면 등교' .. 정작 학생은 어디에 있나요?
[송재범의 교육說] '전면 등교' .. 정작 학생은 어디에 있나요?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1.09.01 0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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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재범 서울 신서고등학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에듀프레스] 2021년 9월의 가을, 학교 현장의 화두는 등교 확대이다. 전면 등교에 대한 협의를 위해 부장 회의를 했다. 그런데, 회의를 앞두고 한 부장 선생님이 던진 메시지에, 나는 선방에서 졸다가 죽비로 어깨를 강타당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과 같은 메시지 때문이다.

“온갖 매체에서는 ‘코로나’와 관련한 학생들의 학력, 관계 등 성장에 관련된 요소를 소재로 온갖 콘텐츠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세상을 등지는 학생이 많아졌다는 식의 기사도 마음을 때리고요. 한 명의 교사로서 아이들의 이런 모습과 현실이 너무 무거워서 어찌해야 할지 무기력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우리학교’의 아이들이고, 그 아이들을 만나는 ‘우리들’ 간의 상황이라면 좀 다른 힘을 낼 수 있을 듯하여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 험한 시기에 ‘전면 등교’의 압박을 받고 있고, 그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년 반을 ‘블렌딩 수업’을 하다가 전면 등교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 하나하나를 찬찬히 관찰하며 일상을 살지 못하던 아이들이 '잃었던 것'은 무엇일지, 그걸 위해 '우리가 무얼 시도해야 하는지'를 상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수업에서 학급에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또 다른 원격수업에서, ‘코로나 세대’인 아이들과 어떻게 배움과 성장의 근육을 키워갈지 생각 나누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뼈아픈 일침에 머리끝이 얼얼하다. 준엄한 죽비 내림에 신음소리를 내기도 조심스럽다. 되돌아보니 지난 1년 반 동안 우리 교육에서 가장 흥행한 단어는 코로나 방역, 원격 수업, 학습 격차 해소, 그리고 각종 이름으로 포장된 대책이었다. 현실적으로 모두 필요한 일이었고 시급한 과제들이었기에, 이것을 준비하는 교육 당국이나 실제로 적용해야만 하는 학교 현장의 어려움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교육이 보여준 모습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그려볼 수 있다.

첫째, 절박함이다. 시시각각으로 표정을 바꾸는 코로나의 변덕 속에서 우리의 대응은 차분한 검토나 장기적인 정책보다는, ‘2주간 시행해보기’의 단기 대책이었다. 현실적으로 여유가 없었고, 긴 호흡의 플랜이 형성될 수 없었다. 얼마 전 등교 확대를 앞두고 학교를 방문한 국무총리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사회적 지혜를 어른들이 빼앗아선 안 된다는 절박감이 있다”는 표현에서도 이런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둘째, 갈라짐이다. 코로나 이전의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코로나 상황에서도 우리 교육은 갈라졌다. 코로나 상황에 적절한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하나였지만, 구체적인 교육과 방역 방안에 들어가면 갈라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사상 최초의 ‘온라인 개학’이 등장했을 때 그것에 대한 찬반의 갈라짐, 그리고 지금 전면 등교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찬반의 목소리가 이러한 사례 중의 하나다.

셋째, 쏟아짐이다. 코로나의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교육 정책들이 수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어김없이 4차 산업혁명의 깃발을 들고 다양한 미래교육 정책들이 쏟아지고 있고, 고교학점제, 그린스마트 미래학교, 생태전환교육 등과 같은 것들이 정책의 목록 대열에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원격 학습으로 인한 학습부진학생 및 학습격차 해소를 위한 대책들도 부지런하게 뒤를 따르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런 세 가지 모습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우리를 엄습했기에, 우리는 생존을 위해 절박 또는 시급하게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다보니 충분한 검토의 시간이 부족했고, 대책의 방향과 효율성에 대한 찬반 논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코로나의 구덩이에서 당장 빠져나오는 대책도 필요하지만,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미래교육 정책을 제시하는 것도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그런데, 우리의 이러한 몸부림과 노력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대부분 당연히 학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1년 반을 돌아보니, 학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학생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학생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땀을 흘린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앞의 한 부장 선생님의 메시지처럼 일상을 살지 못하던 아이들이 ‘잃었던 것’은 무엇일지, 그걸 위해 ‘우리가 무얼 시도해야 하는지’ 학생의 입장에서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여기서 나는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물론, 코로나의 어려움 속에서 제시된 많은 대책과 정책들을 보면, 사업의 추진 배경으로 학생들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분석이 현란한 숫자와 그래프로 나타나고 있다. 문건을 액면 그대로 보면 학생을 위한 대책이요, 정책이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인 상황 분석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물을 수밖에 없다. 그 상황은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인가? 과연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있는 학생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인가? 아니면 교육 정상화라는 교육적 당위와 관찰자적 입장에서 바라본 학생의 상황이 아닌가? 정말 우리가 위해주고자 하는 학생은 존재하는가?


예를 들어, 어느 때보다도 학습부진학생 및 학습격차 해소를 위한 대책들이 요구되고 있고, 교육 당국도 지속적인 대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그 대책들이 정말로 개별자로서의 ○○○ 학생이 원하는 대책인가? 숫자로 나타난 학습부진학생 비율, 학습격차 현황 등을 보면서 그 숫자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대책이 아닌가? 숫자와 개념으로 분류화된 집단으로서의 학생만이 보일 뿐, 어두운 골방 구석에서 맞춤형 도움을 기다리는 개별호소자로서의 학생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 7월 교육부가 발표한 「교육회복 종합방안 기본계획」의 추진 배경으로 “학교가 일상을 되찾기 위한 종합적인 교육회복 대책이 긴요”하다는 표현 속에서도, 학교는 보여도 학생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통계화된 수치로서의 학생이 아니라 각기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개인으로서의 학생을 보아야 한다. 학생 개개인의 입장에서 출발한 교육 대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학생 개개인의 입장을 고려한 교육을 위해 어떤 접근법이 필요할까? 하버드 대학의 토드 로즈(L. Todd Rose) 교수가 『평균의 종말(THE END OF AVERAGE)』에서 제시한 개개인학(science of the individual)이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학교 교육과 관련해서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는 ‘개인 맞춤형 교육’이다. 이것을 로즈는 개개인학의 수준까지 끌어올린다. 개개인학은 개개인의 이해를 위한 주요 도구로 평균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며, 개개인을 이해하려면 개개인성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각의 사람들을 종형 그래프상의 한 점수로서가 아닌 개개인으로서 이해할 도구라는 것이다.

여기서 로즈가 문제삼는 것이 평균주의다. 평균주의란 모든 것을 평균의 입장에서 판단하려는 것을 말한다. 평균주의의 주된 연구 방법은 종합 후 분석(aggregate, then analyze)이다. 먼저 여러 사람을 종합적으로 조사한 뒤 그 그룹의 패턴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이 그룹 패턴(평균이나 통계치)을 활용해 개개인을 분석하고 모형화한다. 반면 개개인학은 분석 후 종합(analyze, then aggregate)을 주장한다. 먼저 각 개인의 패턴을 살펴본 다음 이런 개개인별 패턴을 취합해 종합적 통찰을 얻어내는 방법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우리가 실행하고 있는 수많은 교육 대책과 정책들이 평균주의가 애용하고 있는 종합 후 분석의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지는 않은가? 학생들은 종합으로 포장된 수혜자의 숫자를 구성하는 1/n일 뿐,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가 처한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학습부진학생 비율 속에 포함되는 부류의 식구일 뿐, 그 개인이 실질적으로 어떤 학습 환경에 처해 있고 어떤 학습 지원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없다. 개개인의 교육 환경과 패턴을 먼저 읽어내고 그로부터 종합적 통찰을 통해 개별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분석 후 종합의 접근 대책이 필요하다.

평균이 지배하고, 숫자가 난무하는 사회다. 세계적인 석학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에서, 차가운 정의(justice)의 세계에도 시적(문학적) 감성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녀가 말하는 문학은 나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우리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 문학은 한 개인의 상황과 내면 세계를 생생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묘사한다. 과연, 우리는 나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학생이라는 존재를 우리 앞에 데려와서 그의 상황과 내면 세계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는가?

누스바움은 이성이 지배하는 법정의 재판관에게도 시적 감성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교육을 담당하는 우리에게는 더 풍부한 시적 감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 교육은 시(詩)를 잃어버리고 차갑게 파편화된 정의(justice)들만이 가을 하늘을 뒤덮고 있다. 교육 정책과 칼럼의 제목에서는 학생을 말하지만, 정작 내용으로 들어가면 학생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가을에 시인(詩人)이 되어보자. 그리고 학생을 소재로 한 시(詩)를 써보자. 그 시(詩)를 통해 학생들의 잃어버린 실존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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