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의 교단춘추] 교육이 불평등의 해답인가?
[전재학의 교단춘추] 교육이 불평등의 해답인가?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1.08.12 0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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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에듀프레스] 학력은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가? 현실적으로 전 세계 각국의 정부 내각 구성원들을 보면 최소 대졸 이상으로 학력이 공적으로 중요한 조건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실례로 미국에서는 2000년대에는 대학 성적을 얼마나 잘 받았는지, 심지어 대학 입학시험을 통과했는지 여부가 대통령에게 후광으로 작용할지 반대로 치명적인 결점으로 작용할지 미묘한 문제로 등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약한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유세에서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능력을 소재 삼아 적절한 학위 소지자인지에 대한 인신공격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학력주의는 이렇게 권력의 성패를 가르는 중대한 요소였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 관련 사례를 좀 더 들어보자. 후보자의 능력의 유무에 대한 척도로 학력 논쟁이 심하게 일기도 했다. 1987년 첫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조 바이든에게 어느 유권자가 “어떤 로스쿨을 다녔고 어느 정도의 성적을 받았느냐?”고 캐물었다.

2017년 한 집회에서 트럼프는 엘리트(elite)를 실컷 욕하더니 잠시 뒤에는 자신이 엘리트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이는 대학 학력을 무기화하려는 단적인 예(例)이다. 이로써 학력을 매개로 한 능력주의가 얼마나 폭정을 자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뿐이랴.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교육의 중요성과 일자리의 연관성에 대해 “우리가 뭘 얻을 수 있느냐, 그것은 우리가 뭘 배울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바야흐로 글로벌 경쟁 시대에는 대학 학위가 없는 노동자가 그럴듯한 보수를 주는 직장을 찾기 어려울 수밖에 없음을 나타냈다.

클린턴은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뭘 얻을 수 있느냐는 우리가 뭘 배울 수 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라며 임기 중에 30번 이상 이런 식으로 학력을 강조한 것으로 정치사에 널리 알려졌다. 후임 오바마 대통령 역시 노동자들이 겪는 경제적 곤경의 해답을 고등교육에서 찾았다. 심지어 글로벌 경쟁에 대해 “더 많은 교육이 해답”이라고 확언하기도 했다.

세계화 시대는 노동계급에게 큰 폭의 불평등 확대를, 또한 임금의 정체를 안겨주었다. 예컨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0퍼센트는 대부분의 이익을 챙겼고, 하위 50퍼센트는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진보적, 자유주의적 정당들은 이런 불평등을 직접 다루지 않았고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외면했다.

대신 그들은 시장 주도적 세계화를 받아들였으며 기회의 평등을 늘리기 위한 정책을 통해 불평등한 혜택을 조장했다. 예컨대 인종이나 출신 계층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락하는 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회적 상승 담론으로 학력에 의한 능력주의의 신봉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는 소득 사다리의 간격을 점점 더 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의 작가인 토머스 프랭크(T. Frank)는 진보주의자들이 불평등의 해법으로 교육에 중점을 두는 시각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모든 중대한 경제 문제는 사실 교육 문제일 뿐이다. 루저들은 모두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미래 사회에서 필요한 기술과 학력을 따내지 못한 자들일 따름이다”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엉터리 불평등 해법이라고 자신의 글에서 한껏 비난을 쏟아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대한민국은 극심한 빈부격차를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다. 한때 개발 과정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사회적 계층 간의 격차를 보여준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격심한 빈부의 격차를 가진 불명예스러운 국가로 등장하였다. 아예 출발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불평등을 안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무엇으로 그 간격을 메울 수 있을까?

한때 그것은 교육, 특히 학력주의에의 의존으로 집중되었다. 그래서 한국은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을 가진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경제침체와 고용불안으로 오늘날 우리 대학의 성패는 졸업생들의 취업률에 의해서 결정되고 이는 곧 명문대의 순위를 판가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능력주의자들은 사람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일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부지불식간에 학력주의를 조장한다. 예컨대 대학에 가지 않는 사람에게 극단적인 편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학력주의 편견은 능력주의적 오만의 한 증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에 더욱 물들게 되면서, 엘리트들은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을 얕잡아 보고 무시하는 경향마저 나타냈다. 이들이 대학에 가서 자신의 조건을 향상시키라고 노동자들에게 세뇌하듯 말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결국 학력주의를 조장하고 학력이 뒤진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대학 진학이 계속 강조되는 것은 비대졸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부추기는 것이다. 교육이야말로 사회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이라는 의식은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의 집단에 대한 부정 평가를 악화시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할 위험성만 커진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불평등을 더 선뜻 받아들이게 되고 성공은 능력 나름이라는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하지만 교육은 개인의 능력과 책임이라 말할 수 없다. 이는 전적으로 국가가 담당하여 기회의 문을 활짝 열어 주어야 한다. 현재 우리 정부와 지방자치 단체가 고등학교 전 학년 무상급식과 교육비 지급을 확대하여 실시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유럽의 교육 선진국들은 대학 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교육은 국가가 관장하는 핵심 영역으로 자리를 잡았다.

결국 교육이 불평등에 대한 해법이라는 주장은 학력주의를 조장하고 정당화시키며 학력 간의 균열을 초래할 뿐이다. 한때 기회의 문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대학 학위는 이제 학력주의자의 특권과 능력주의 오만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오로지 교육이 불평등의 해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사회적 상승 담론을 부채질하며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필자는 “학벌사회 파타! 청소년들의 강력한 저항이 필요하다”를 칼럼으로 제시한 바 있다(기호일보 2021. 6. 3.일자). 지금도 우리의 현실은 어른들이 단합해서 청소년들을 노예 상태로 묶어 놓고 있는 상황이다. 김누리 교수는 이런 학생들을 우리 사회의 ‘마지막 노예’라고 지칭한다. 이제 한국의 청소년들도 자신의 노예 상태에 대해 정치적 자각을 해야 하며 자신들을 옥죄고 길들이는 학벌 사회에 강력한 저항을 펼침으로써 18세 선거권 획득에 발맞춰 학생 파워를 형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대학 학위가 품격 있는 직업과 사회적 명성의 조건이라는 생각을 폐기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주범이다. 또한 비대졸자의 사회적 기여를 폄하시키며 사회의 저학력자들에 대한 편견을 부추긴다. 그리고 그들을 대의 민주주의 정치에서 배제시켜 사회적 갈등을 더욱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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