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 삶, 그것은 0의 순환이다.
[교육칼럼] 삶, 그것은 0의 순환이다.
  • 김민정 기자
  • 승인 2016.12.16 2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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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정겸 동국대 교수

태어나기 전 우리는 0이었다. 0에서 태어나는 순간 1이 된다. 이 1은 또 다른 1을 만나 2가 된다. 2는 자신들의 세포 복제과정을 거쳐 자기들과 비슷한 그러나 또 다른 숫자들을 만들어 낸다.

나는 이를 2+n으로 표시하고 싶다. 그런데 이 n들은 자기와 전혀 다른 n과 만나 또다시 2가 되고 조금 후에 또다시 2+n의 형태를 갖춘다. 계속되는 2의 세포 분열 속에서 세상이 유지되지만 n의 떨어져 나감은 2만 남게 된다.

그러나 이 2는 죽음, 이혼 등의 여러 가지의 이유로 1이 된다. 1이라는 숫자는 시각적으로도 외로워 보인다. 심리학적으로는 더 외로워 보인다. 그래서 그 1은 또 다른 1을 찿아 공허함을 메꾸려고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1은 혼자서 그 화려함의 행진을 멈추고 자신의 원래 모태였던 0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0은 없음이 아니다. 노자 도덕경 제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도가 하나 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의 내용과 같다.

노자의 道가 0인 것이다. 0은 만물의 근원이 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0은 세상을 세상답게 해주는 조화의 원리이다. 만물은'음'을 업고 '양'을 안아 '기'가 충만하여 조화를 이룬다[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 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 ‘음’은 1이며 ‘양’은 또다른 1로서 ‘음과 양’은 서로 다른 각자이지만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둘은 붙어 다녀야 한다. 즉, ‘업고 안아’야 할 것이니 이 둘이 합하여 지면 생기(生氣)가 넘치고 조화를 이루게 된다. 사람”인(人)“의 원리와 같다. 人의 글자에서 보다시피 이는 사람들이 서로 기대어 있는 형상이다. 어느 하나가 내어준 어께나 등을 거두어 버리는 순간 그 어나 하나는 땅으로 고꾸라져 버리게 된다.

人은 仁이다.

내어준 어께나 등을 서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상생(相生)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상생은 조화이다. 상생은 사랑이다. 仁이라는 글자는 사람(亻)이 둘(二) 모여 있는 형상으로서 仁은 따듯함과 사랑이 있는 단어이다. 세상은 2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이다.

2는 1에서 나온 것이고 1은 0에서 나온 것 이기에 0은 조화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0은 없음(무:無)이 아니다.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무(nicht)는 이런 의미에서 0이이다. Sartre의 “무”는 끊임없는 미래로 기투[Entwurf(기투:企投)하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즉, 무는 자유이다.

기투란 인간존재의 의지와 자유를 의미한다. 피투[Geworfenheit(피투성:被投)]란 ‘던져졌다’는 의미이다. “내 던져진” 존재인 1은 자유로운 존재인 것이다. 1은 앞으로 펼쳐질 다양한 가능성에 대하여 스스로를 선택하는 기투적 존재이다. ‘내 던져진 존재인 1’과의 만남은 사랑과 따듯함으로 기투하여 간다. 그래서 세상은 조화로운 것이다.

불교에서의 존재의 법칙은 연기법이다. 연기법에서 “유무(있음과 없음)”는 존재의 공간적 관계이고, 생멸은 존재의 시간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연기법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이다. 연기법의 공간적, 시간적 관계를 살펴보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도 있다.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도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도 멸한다.”이다. “있다”는 0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공(空)역시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고 소유하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空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채움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노자의 무도 없음이 아니라 있음의 것을 비우라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 3장에서 “성인은 마음을 비우고 백성의 배를 채워라”고 말한다. 노자의 도덕경은 정치인에게 말을 던지는 것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경고장이기도 하다.

마음을 비우면 가슴 가득 채워지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행복이다. 나눔은 채워주는 것이다. 노자의 무는 없음이 아니라 있는 것을 덜어 냄으로서 또 다른 생산, 즉 행복을 채워 주는 것이다.

0은 없음의 단초라기보다는 시작의 씨앗이다. 0이 無로 본다면 세상이 어두워진다. 0에서 출발하여 1이 나오기 때문에 0은 없음이 아니라 시작의 희망이다. 희망을 보자. 0으로 되 돌아 감을 슬퍼하지 말자. 0으로서 세상을 만들고 조화롭게 하였으며 또다시 나는 1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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