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범의 교육說] 듀이에게 묻다 .. 요즘 교육, '왜' 피곤할까?
[송재범의 교육說] 듀이에게 묻다 .. 요즘 교육, '왜' 피곤할까?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1.08.02 2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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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재범 서울 신서고등학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에듀프레스] 8월 무더위, 휴가 대신 독서로 견뎌보기로 했다. 사공이 많아서 산으로 가고 있는 우리 교육의 현실을, 교육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사범대학 시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듀이(John Dewey)의 글을 다시 들춰보기로 했다. 그 제목도 생생한 『민주주의와 교육』 (Democracy and Education, 이홍우 옮김)이다. 책의 부제가 「교육철학 개론」(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Education)이듯이, 교육학의 분류로 본다면 교육철학에 해당하는 저술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교육에 대한 모든 내용을 다루는 「교육학 개론」에 가깝다. 요즘 시중에 나와 있는 ‘교육학 개론’이라는 타이들을 붙인 책들이, 교육(사범)대학의 강의교재나 학원가의 수험교재 용도의 백화점식 편집서라면, 『민주주의와 교육』은 단순한 내용 나열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교육, 어떤 사회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지도와 같다. 옮긴이가 ‘현대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라는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말을 빌어, ‘현대 교육학은 『민주주의와 교육』의 주석’이라고 평가하는 과장(誇張)에 대해서도 크게 이의를 달고 싶지는 않다.

‘삶의 필연성으로서의 교육’이라는 제목을 붙인 제1장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생물과 무생물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전자가 갱신에 의하여 스스로를 존속시켜 나간다는 데에 있다. 돌은 무엇으로든지 두드리면 저항한다. 만약 돌의 저항력이 그것을 두드리는 힘보다 크면, 돌은 겉으로 보아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돌은 산산조각이 난다. 그러나 돌의 경우에는, 두드리는 힘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존속시키려고 하지도 않거니와, 그 힘을 역이용하여 스스로 행위를 계속해나갈 원동력으로 삼는 일은 더욱 하지 않는다. 생명체는 자기보다 큰 힘과 대항할 때는 쉽게 부서지지만, 그래도 자기에게 작용하는 에너지를 이로운 방향으로 돌려서 자기의 생명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 만약 이 일을 할 수도 없으면, 생명체는 돌처럼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로서의 존재양식을 잃어버리고 만다.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한 책의 첫 부분에 대해서 실망하던 지난날이 생각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너무나 당연한 소리의 연속이 아닌가? 제목은 ‘삶의 필연성으로서의 교육’이라고 해놓고, 생뚱맞은 돌과 생명체의 이야기만 하다니! 하지만 계속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인간의 경우에는 생물학적인 존재의 갱신과 더불어 신념, 이상, 희망, 행복, 불행, 그리고 활동의 재창조가 이루어진다. 어떤 경험이든지 사회 집단의 갱신을 통하여 영속되어 나간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교육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삶의 이러한 연속성을 유지하는 수단이다. …… 사회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성원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이 원초적이고 불가피한 사실이 교육의 필연성 또는 필요성을 규정한다.

역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에 짜증이 날 만도 하지만, 구구절절 맞는 소리임에야 어쩔 수 있으랴! 그렇다. 교육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활동 중의 한 종류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과 사회의 생존을 위해 교육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우리가 돌이 아닌 이상 교육이라는 행위는 우리 삶에 필연적인 것이다. 이렇게 교육이 피할 수 없는 우리 삶의 영역이라면, 특별히 요즘 들어 교육이라는 활동이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왜 교육이라는 단어가 생기보다는 피곤함으로 느껴질까?

그 실마리를, 인간 활동에 대한 “왜?”라는 질문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겠다. 인간 활동에 대한 “왜?”라는 질문은 항상 그 의미가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구체적인 문맥에 따라서 몇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제기되기도 하고, 한 가지 같은 의미로 제기되었을 경우에도 그것에 대답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왜?”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가장 보편적인 의미로서 “왜?”라는 질문은 어떤 활동이나 행위의 “이유”를 묻고 있다. 행위자가 A, B, C의 세 가지 서로 다른 행위들 중에서 자의(自意)로 한 가지를 선택했을 경우, 우리는 그 행위자에게 왜 다른 것(B나 C)를 하지 않고 그 행위(A)를 했는가를 물을 수 있다. 이것이 곧 행위의 “이유”를 묻는 질문이다. 따라서 “이유”라는 개념에는 행위자가 자유선택에 의해서 자신의 행위를 결행했다는 뜻이 함의되어 있다.

둘째, “왜?”라는 질문은 때로 “현실적 필요성”을 묻고 있다. 앞에서의 “이유”라는 개념과 이 “필요성”이라는 개념은 구분되어야 한다. 모두 행위와 활동의 배경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유”는 그 행위나 활동의 근원적 배경, 흔히 본질적이라고 부르는 그런 배경을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요성”이란 그 근원적 배경이야 어쨌든 간에 그러한 활동이 있게 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요청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셋째, “왜?”라는 질문은 또한 어떤 행위나 습관의 “원인”을 묻는 것으로 사용된다. 원인이라는 개념은 행위자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라는 뜻을 함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유”라는 개념과 중요한 차이를 가진다. 이 점에서 “원인”이란 개념은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된 사실적 경과 또는 인과적 법칙관계를 설명할 때 적합하다. 인간의 행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심리학자들의 노력은 모두 인간의 사회적 활동에 감추어진 여러 가지 메커니즘(mechanism), 곧 원인을 밝히려는 노력에 속한다.

이렇게 인간 활동에 대해 “왜?”라는 질문이 갖는 의미를, “이유”, “현실적 필요성”, “원인”으로 구분해 볼 때, 그 차이점은 자의성(自意性)에 있다. 즉, “이유”의 의미에는 자의적(自意的) 선택 가능성이 크게 내포되어 있지만, “원인”이라는 상황에서는 자의성(自意性)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어떤 활동을 한다’라고 할 때는 그의 가치관과 선택이 충분히 개입되고 있지만, ‘나는 이런 “원인” 때문에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라고 할 때는 행위자의 의도가 들어가기 힘든 강제에 가까운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수행하는 다양한 교육 활동도 이 의미에 적용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고등학생이 선택과목을 정하는 데 있어서 ‘왜 그 과목을 선택했느냐’고 묻는다면, 현실적으로 그 대답은 거의(?) “원인”에 가깝다. 수능에 나오는 과목이기 때문에……. 그리고 ‘왜 원격 수업을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현실적 필요성”을 말하는 것에 가깝다. 코로나 상황에서 그 필요성은 얼마든지 제시될 수 있다. 두 사례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진정한 자의성(自意性)이 결여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선택에 불과하다.

요즘 교육 현실과 교육 활동에 대해 피곤함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교육 활동 대부분이 “원인”과 “현실적 필요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 “이유”에 기반한 교육 활동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인과관계와 현실이 요구하는 “원인” 및 “필요성”에 따라 나의 교육 활동이 수동적으로 전개되기에 피곤할 수밖에 없다. 나의 “이유”를 들어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하는 교육 활동을 할 수 없기에 피곤하다. 내가 행동해야 하는 “교육적 이유”를 전시할 교육 공간이 우리 사회에 없기에 피곤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 사회의 교육 쟁론(爭論)도 또한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우리 교육에 대해 걱정하는 전문가들이 던지는 언설(言說)을 보면, 결론 부분에 가서 교육의 근본적 의미와 본질을 주장한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보면 “현실적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실, 그 현실적 필요성이라는 것이 논자(論者)에 따라 크게 차이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주장하는 “현실적 필요성”의 적절성 논쟁에 대해 우리는 피곤할 수밖에 없으며, 귀에 박힌 필요성 목록의 도돌이표에 싫증이 나기도 한다. 교육 전략이나 방법에 대한 논의는 많지만, ‘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가?’의 “이유”를 묻는 장면을 만나보기 어렵다.

어린아이들은 수없이 “왜?”라고 묻는다. 그들이 묻는 “왜?”의 의미는 “원인”이나 “현실적 필요성”이라기보다는 “이유”에 가깝다. ‘어른을 뵈면 인사해야 한다’라는 요구에 “왜?”라고 묻는 것은 바로 “이유”를 묻는 것이다. 어떤 행위의 의미를 묻는 것이고, 그 의미에 따른 행위의 적절성을 묻는 것이다. 그 수많은 “왜?”의 질문을 던지면서 아이들은 피곤해하지 않는다. 밥을 먹는 것이 즐거운 것처럼, 그들에게 “이유”로서의 “왜?”라는 질문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교육 활동에 있어서 “이유”를 묻는 이 자연스러움과 즐거움을 잃었다.

‘왜 교육이 필요한가?’라는 교육의 근본 “이유”에 대해서는 듀이 선생님으로부터 삶의 필연성이라는 한 가지 대답을 얻었다. 이제부터는 실제적인 교육 현장에서의 교육 내용과 방법에 대해서 끊임없이 ‘왜 이것을 해야만 하는가?’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의 “이유”를 물어야 한다. 이것이 교육에 대한 우리의 피곤함을 덜어줄 수 있는 8월의 휴식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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