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의 교단춘추] 코로나에 막힌 소통, 불신의 골 깊어진 교육현장
[전재학의 교단춘추] 코로나에 막힌 소통, 불신의 골 깊어진 교육현장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1.06.10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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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 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 세원고 교감

[에듀프레스] 소통(疏通)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는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온통 소통을 언급한다. 그래서 말과 글의 중심 소재로 소통은 단골메뉴다. 특히나 조직의 효율성을 언급할 때면 소통은 만병통치약(cure-all)으로 둔갑한다. 결국 어떤 제기된 문제든지 그 해결책으로 소통만이 정답으로 결론을 내리는 시대다. 그토록 소통은 현대인에게 중요한 기능이자 책무성을 띤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어디서든 고통스런 과정이 숨겨져 있음을 간과하기 쉽다. 왜냐면 누구나 소통을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겉 다르고 속 다르게 소통을 바라보는 태도다. 코로나 시국의 학교도 여기에서 결코 예외가 아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코로나19의 여파는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스포츠 등 어느 영역할 것 없이 심각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이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바이러스의 감염 리스크는 인간 사이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일상화하고 대면 시조차 대화를 억제한다. 따라서 그로 인한 소통의 결여나 부재는 누적 효과가 나타나면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른바 풍선효과라 할까? 각종 사회적 소통망, 즉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상에서는 활발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또한 익명이 보장된 댓글인지라 각자의 확증편향성에 따라 각종 욕설이 난무하고 타인에 대한 비방과 인간관계의 기본 에티켓이 사라진 아노미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 후유증이 타인과의 관계형성 시기인 청소년기에 크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청소년 사이의 사이버폭력이나 극단적 선택의 확산이 바로 그것이다.

학교는 두 말할 이유 없이 학습과 사회성 발달을 촉진시키는 곳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역시 소통의 부재가 매우 심각한 상태다. 예컨대 학생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온라인 수업에서 등교수업으로 전환이 되자 공동체의 생활규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속속 나타나고 있다.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고 오직 자신만을 위한 행동이 그대로 노출된다. 이는 집에서 형성된 자유분방한 습관과는 달리 학교에서는 마스크 착용과 방역 조치에 따른 소통의 제한으로 타인의 생각과 자기의 생각을 잘 조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다 타인의 말 한 마디에 상처를 받거나 인내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충동이나 혼자의 방식으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마치 공동체의 생활규범이나 공중 예절, 협의과정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로인한 후유증이라 할까? 학교는 금년 초부터 자퇴 학생이 증가하는 심각한 상태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즉,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분위기 자체에 익숙하지 않아 모든 것이 낯설고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또다시 온라인 수업으로 집에서 혼자의 생활을 반복한다. 온라인 수업은 교사의 눈에 잘 띄지 않아 수업 중에도 비교적 자유롭다. 즉, 수업 중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즐길(?) 수 있다. 느슨해진 온라인 출석 규정과 수업 중 상호작용에 의거한 학생중심 활동이 소극적이어서 학생은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수업 중에 질문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학습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학력의 저하는 심화되고 있다. 이는 빈부의 격차에 따라서 더욱 악화되고 바로 학력 격차로 이어져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문제는 가르치는 교사도 소통의 부재에 따른 부작용이 학생에 못지않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교직은 교사의 교육적 자율성을 강조해 다른 분야보다 고립감이 심한 편이다. 그런데 그것이 코로나 시국을 기반으로 이젠 무수한 다도해를 연상하는 교직 사회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교육공동체를 위한 업무는 조그마한 것에도 짜증과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이거 왜 해야 되요? 왜 내가 해야지요?”라는 질문이 갈등의 시작을 알린다. 그뿐이랴. 상호 간에 단체로 모이기를 꺼려하는 분위기를 틈타 대화와 토의⋅토론이 소극적이고 따라서 소통은 일방적인 흐름으로 가기 때문에 개개인의 생각이나 집단지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함으로써 공동체의 합의와 협력을 이끌어 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간단한 사례를 들어보자. 학교는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을 필요로 한다. 여기엔 매년 수없이 반복되는 교과 이기주의와 발언권이 강한 특정 교사를 중심으로 이해관계에 얽매이기 쉽다. 그래서 진정으로 학생을 위한 교육과정 편성은 그야말로 난항이다. 자주 만나지 못해 쉽게 진전이 되지 못하고 공전되는 교과별 협의회나 교육과정위원회 협의회는 고성이 난무하고 상호 간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그뿐인가. 소통의 부재는 학생들도 교사에게 수업의 불만을 직접 토로하지 못하고 바로 국민신문고로 직행한다. 여기엔 교사에게 의견을 제시할 기회가 줄어들고 또한 어쩌다 생각을 말하면 교사들의 역린을 거슬러 불이익을 당할까봐 꺼리거나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에 충분한 기록을 해주지 않을까 봐 염려하여 감히 담당교사와 소통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내에는 익명의 대자보가 등장하고 교육청으로의 민원 제기, 국민신문고에 올리기 등 밖에서만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또한 학교의 관리자는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각종 글로 전달되는 소원수리(민원)를 처리하느라 주요 업무보다 몇 배의 고통을 받고 있다.

소통, 참 어렵다. 원만한 대화의 기회가 제한되고 또 이를 부추기는 사회분위기는 학교라는 작은 조직조차 더욱 소통의 부재에 시달리게 한다. 감정 노동자인 교사들은 과거보다 훨씬 많은 다양한 민원에 따른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동체의 이단아로 살아가는 교사들이 많아졌다. 소위 ‘천상천하 유아독존’ 식으로 행동하는 교사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학교 관리자를 마치 외부의 적을 대하듯이 불신한다. 여기엔 처음부터 소통을 시도하지 않고 무조건 공격의 대상으로 치고 나오는 불편한 진실이 존재한다. 어렵게 대화하고자 하면 눈물부터 흘리며 마음속의 오래된 상처를 드러낸다. 어떻게 받은 상처인지 내막을 알고 보면 대개 민원에 시달리거나 관리자와의 갈등이 축적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로인해 상대가 누구든 불신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는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의 막중한 역할은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교사, 학생, 학부모, 교직원의 소통이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상호 간의 소통의 통로가 막힘으로써 불신과 이기심에 기초한 학교 문화는 갈등으로 얼룩져 간다. 이를 어떻게 조화롭게 만들어가느냐는 어느 한 교사, 학교의 관리자만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교육 시스템, 조직의 시스템이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가장 기초적인 것조차 실행하지 못하는 현실이 코로나 시국의 학교의 실상이다. 이는 넓게는 우리의 정치에서부터 불신의 골이 깊어 교육 현장인 학교로 확산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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