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범의 교육說] 나라 사랑과 교육 사랑
[송재범의 교육說] 나라 사랑과 교육 사랑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1.06.01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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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재범 서울 신서고등학교장
 

[에듀프레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힘쓴 사람들의 공훈에 보답하고 그분들을 기리는 달이다. 호국(護國)은 나라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의미다. 호국(護國)을 생각하면서, 책 장에 꽂혀 있는 두 권의 소설책을 집어들었다. 『남한산성』(김훈 저)과 『강화도』(송호근 저)이다. 청나라[병자호란]와 일본[강화도 조약]이라는 열강의 침략 앞에서 나라를 지켜내야만 했던 우리 조정의 처연한 모습이 소설로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는데......

우선 『남한산성』의 한 장면. 코앞에 진을 치고 있는 청의 황제(칸)에게 항복문서를 보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다.

최명길이 말했다.

“상헌은 제 자신에게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적들이 성벽을 넘어 들어오면 세상은 기약할 수 없을 것이온데, 상헌이 말하는 근본은 태평한 세월의 것이옵니다. 세상이 모두 불타고 무너진 풀밭에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날 터인데, 그 꽃은 반드시 상헌의 넋일 것입니다. 상헌은 과연 백이(伯夷)이오나, 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하옵니다. 전하의 성단으로, 신의 문서를 칸에게 보내주소서.

김상헌이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소리쳤다.

“전하, 명길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최명길이 김상헌의 말을 막았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바닥이옵니다.”

김류가 말했다.

“명길이 제 문서를 길이라 하는데 성 밖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글과 같을 수야 있겠나이까. 하지만 글을 밟고서 나아갈 수 있다면 글 또한 길이 아니겠나이까?

임금이 겨우 말했다.

“영상의 말이 어렵구나. 쉬고 싶다. 다들 물러가라.”

다음은 『강화도』의 한 장면. 강화도 앞 바다에 진을 치고 위협하는 일본군의 위세 앞에서 역시 논쟁이 벌어진다.

고종이 말했다.

“저들이 서계 문제로 이 나라를 이토록 괴롭히니 짐은 한시도 평화로운 날이 없구려. --- 며칠 전에 또 이 문제를 따지러 일본 사신이 왔으니 오늘은 아예 매듭을 지읍시다.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영의정 이유원이 말했다.

“이 문제로 왈가왈부한 지 어언 7년이나 되었사온데, 옳으니 그르니 안팎에서 말이 많사옵니다. --- 신은 어리석어 판별하기가 난망한데 영남 유림이 또 일제 궐기를 준비한다는 소문이옵니다.”

“그래서 어찌하자는 말인고?”

고종이 역정을 냈다.

좌의정 이최응이 아뢨다.

“--- 전하께서 이 곤혹한 사정을 중국에 호소해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는 국서를 보냄이 어떠하신지요?”

“지난번에도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고종이 다시 역정을 냈다.

우의정 김병국이 말했다.

“일본은 원래 믿을 수 없는 나라입니다. --- 저리 건방지고 오만불손한 서계를 들이대니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 통촉하여 주옵소서!”

“형판은 어떠한고?”

고종은 박규수에게 물었다.

“그간 일본이 격식을 어기고 서식을 제 마음대로 고쳐 쓴 것은 맞습니다. --- 일본을 내칠 필요가 없다는 게 소신의 생각입니다.”

고종은 갈피를 잡지 못해 착잡해졌다.

“대체 일본이란 나라는 어떤 나라인고? 결론을 내릴 수가 없구려. 영의정은 주변 정세를 잘 살피어 곧 대책을 내려주시오. 오늘은 이만 끝냅시다.”

참으로 무기력하다.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인데, 나라의 운명을 책임져야 할 조정의 대책은 허망하기만 하다. 『남한산성』의 인조는 쉬고 싶어 모두 물러가라는 것으로 회의를 끝낸다. 『강화도』의 고종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영의정에게 알아서 대책을 만들어보라는 명으로 회의를 마친다. 이게 과연 한 나라를 책임진 임금으로서 제대로 된 호국(護國)의 의지를 찾아볼 수 있는가?

호국(護國)은 나라 사랑으로부터 출발한다. 나라가 지켜내야만 하는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고 애쓰듯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 역시 나라를 위해 자신의 많은 것을 바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인조와 『강화도』의 고종에게서 회의를 주재하는 임금으로서의 지위는 보이지만,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지켜내려는 나라 사랑의 모습은 읽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는데 피곤해서 쉬고 싶다거나 아래 사람에게 대책을 알아보라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가 나타날 수는 없다. 인조와 고종이 진정 나라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회의를 마칠 수 없다. 소설 속의 인조와 고종에게 위태로운 나라는 목숨 바쳐 지켜야 할 ‘사랑거리’가 아니라 ‘골칫거리’일 뿐이다.

이 모습을 작금의 교육 문제에 적용해 본다. 지금 우리 교육은 평안한가? 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위기를 말하고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새로운 모습이 아니다. 늘 그래왔다. 하지만 요즘 느끼는 위기 의식은 이전과는 다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육,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 AI 교육과 융합 교육 등 다양한 요구의 성찬(盛饌)이다. 그런데 그 수많은 요구 속에 교육에 대한 사랑의 온기(溫氣)가 느껴지지 않는다. 교육을 내가 품고 지켜나가야 할 ‘사랑거리’가 아니라, 그 누군가가 해결해줘야 할 ‘골칫거리’나 ‘숙제거리’로 여길 뿐이다. 교육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남한산성』의 인조와 『강화도』의 고종에게서 나라 사랑을 읽을 수 없듯이, 지금 우리 임금에게서는 교육 사랑을 읽을 수 없다. 지근거리에 교육을 책임지는 수석 승지(承旨)를 두지 않았으며, 그 업무를 담당하는 일반 승지(承旨)마저도 한 달 넘게 공석이다. 현재 우리 임금에게 교육은 ‘사랑거리’가 아니라 피곤한 ‘골칫거리’처럼 보인다. 직접 나서서 어루만져주고 지켜주려 하지 않는다. 피곤할 뿐이고, 담당자에게 맡겨놓을 뿐이다. 교육을 사랑한다면 이럴 수 없다. 호국보훈의 달, 매일 전쟁 중인 학교 현장에서는 나라 사랑만큼이나 교육 사랑의 손길이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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