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의 교단춘추]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교사에 대한 교육적 단상(斷想)
[전재학의 교단춘추]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교사에 대한 교육적 단상(斷想)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1.05.31 1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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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에듀프레스] 완벽한 것은 신(神)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을 닮고자 한다. 바벨탑을 쌓아 신에게로 닿고자 했던 것처럼.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하지만 신과 인간의 영역은 분명히 다르기에 인간이 신을 흉내 내는 것은 겸손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극치다. 그러기에 여기엔 반드시 고통이란 형벌이 수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신처럼 되고자 하는 무모한 사람들이 있다. 교사가 바로 그중의 하나다. 교사는 가르치는 소임을 다하고 떠날 때까지 힘겨운 정신노동의 굴레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자, 이른바 현대판 시지프스다.

완벽주의는 교사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이다. 이는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직이 설렁설렁 또는 대충대충 허용하기엔 그 직무가 주는 책임감이 막중하기에 어쩌면 불가피한지도 모른다. 또한 도덕성과 성실성, 품위 유지 의무라는 학교 밖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기도 하다. 그래서 교사는 비록 직업적 가면인 페르소나(persona)를 쓴 채로라도 자신을 다잡고 완벽하게 통제함으로써 타인의 눈에 모범을 보이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행동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는 수업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교사 A,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모든 학생과의 생활에서 몇 가지를 철칙으로 내세운다. 첫째, 학생들은 자기 수업을 잘 들어야 한다. 둘째, 자기가 최초에 정한 학습 목표에 모든 학생이 도달해야 한다. 셋째, 한 명이라도 자기 수업에서 자신을 보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넷째, 수업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다. 다섯째, 모든 학생이 자기 수업을 좋은 수업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완벽주의 지향의 대표적인 교사의 모습이다.

이런 완벽주의는 일견 좋은 점도 있다. 왜냐면 완벽을 기하려는 마음이 업무에서 성과를 더 좋게 내는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자신의 마음 상태다. 완벽주의자 성향을 소유하면 일은 잘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을 즐기지 못한다. 늘 자신이 부족하다는 감정 때문에, 일을 더 열심히 하고, 스스로 다그치고 자학하기 때문이다.

교사 B, 그는 늘 의욕적으로 학교생활을 한다.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실내화를 갈아 신고, 힘차게 담임 업무를 한다. 늘 쉬는 시간에 학생들을 상담하고, 야간에 늦게까지 남아서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준다. 수업도 굉장히 열심히 한다. 학원보다 질 높은 수업을 하려고 유명 강사의 강의를 듣고, 메모를 하고, 학원에서 짚어주지 못한 것까지도 다 정리해서 가르친다. 동료 교사들은 훌륭한 교사라고 엄지척하며 인정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그는 불편하다. 자신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사의 이런 모습에선 일의 성과가 주는 순간적인 행복보다는 늘 불행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항상 부족하다는 감정이 자신을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여유를 갖지 못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야 할 것 같고, 가만히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안정감 있게 바라보지 못한다. 그래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학대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완벽주의가 학생과 동료 교사들에게도 그대로 반영된다는 것이다. 자기 수업을 잘 듣지 못하는 학생들, 자기 의도대로 따라주지 못하는 동료 교사를 미워한다. 그리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까지도 통제하려 지나치게 모든 것에 간섭한다. 물론 자신의 방식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낸다. 자신의 수업에서도 학생들이 가만히 있는 것을 그냥 두지 않는다. 계속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주문해서 끊임없이 학생들이 활동하게 한다.

완벽주의의 가장 큰 함정은 주위의 시선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자신을 잃어버리는 데 있다. 완벽주의에 빠진 교사들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완벽을 기하고 다른 사람의 기대 수준을 맞추기 위해서 자기 것을 줄곧 포기한다. 이런 삶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이 명확하다. 자기를 상실한 채 오직 직업적 페르소나를 쓰고 자기가 아닌 타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에게 타인은 곧 지옥인 것이다.

그뿐이랴. 수업을 잘하고 있으면서도 불안해하고,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수업이 아니라, 남이 잘한다고 하는 수업에 더 열을 올리고, 자신을 학대해가면서 수업을 한다. 눈에 보이는 평가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형식과 기술 측면에서 수업을 포장하려고 할 때가 많다. 주변 교사들의 평가, 기타 다른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자기만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주위에 대한 이런 지나친 반응 때문에 극단주의적 행동이 연발한다. 즉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일이라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잘할 수 있는 일만 더 열심히 하고, 자신 없거나 해보지 않은 일에는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완벽주의 성향의 교사들은 예측할 수 없는 일에는 쉽게 나서지 않는다. 그 결과 그는 언제나 결핍된 상태로 남아 스스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교사는 이런 완벽주의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먼저 교사는 자신의 이런 완벽주의 성향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지치고 소진하게 만드는 감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완벽주의 성향을 보여 타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려 할 때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려 고 하는 것은 아닌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런 후 자신을 위로하고 쓰다듬어 주면서 자기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때 자기에 대한 연민, 즉 측은지심(惻隱之心)이 필요하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기의 시선으로 실존을 물어야 한다.

또한 완벽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자신의 본래 모습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남의 시선으로 자기를 꾸미려 한다. 이는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생을 소비하는 것이다. 이제는 민낯의 자기 모습에 충실하자. 지치고 힘들어도, 서투르고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어도, 침체되어 웅크리고 있어도, 자기의 모습을 찾아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이 자기 삶의 주인이고 자기 존재의 의미가 있다. 교실에서도 학교에서도 자기 삶에서 자기의 향기를 내뿜는 것이 더 인간적이고 더 교육적이다. 학생들은 배움에서 완벽한 신의 모습이 아닌 이런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닮고자 한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를 닮고자 하는 것처럼.

<참고한 문헌> 김태현, 『교사, 삶에서 나를 만나다』, 에듀니티,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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