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의 교단춘추] 21세기 교육은 새로운 것이어야 하는가?
[전재학의 교단춘추] 21세기 교육은 새로운 것이어야 하는가?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1.05.27 23: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에듀프레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가라.’ 이는 새로운 조직(기관)이나 정부가 출발할 때,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진입할 때마다 참신한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구호로 널리 애용되어왔다. 물론 그보다 앞서 성경(마태 9,14)에 기원한 가르침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인류는 21세기의 출발과 함께 이구동성으로 ‘21세기는 새로운 교육을 요구한다’는 교육 슬로건(slogan)을 마치 신앙처럼 내세웠다. 이로써 교육계에서는 21세기 학생들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살았던 학생들과는 완전히 다른 교육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과학기술과 경제의 변화에 따라 학생들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관점의 표출이었다.

하지만 21세기 교육과 19세기 교육은 상당히 관련성이 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떻게 양자를 상반된 관계로 간주하게 되었을까? 이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을 핵심으로 삼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한쪽에선 21세기 역량(skills)으로, 다른 한쪽에선 19세기 지식(knowledge)으로 명명한 것이다. 그래서 현재 ‘21세기 역량’은 교육계 안팎에서 널리 사용하는 교육 유행어가 되었다. 여기서 역량은 문제 해결력. 비판력, 창의력, 의사소통 능력 등의 의미를 내포한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21세기 역량들은 매우 중요하다. 필자는 그 역량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중에 어느 하나도 오직 21세기에만 존재한다거나 21세기에만 중요하게 여겨질 순 없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살았던 기능공도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여 일했고, 적응하거나 혁신하면서 일해야 했다. 2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했으며, 소통하고, 협력하고, 창조하고, 개혁하고 읽을 줄 알아야 했다. 우리가 쓰는 알파벳은 기원전(BC) 21세기에 발명된 것이라 하지 않는가.

미래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21세기 역량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런 능력들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경제적 기회는 더 줄어들 것으로 예측된다. 따라서 과거 엘리트 계층만 받을 수 있었던 교육을 모든 사람이 배울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21세기를 맞이했다 하여 교육의 개념을 새롭게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전통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21세기 교육’이란 개념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바로 창의력과 문제 해결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진부한 주장, 즉 클리쉐(cliche)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역량들이 21세기에 새롭게 필요한 특성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이고 위험한 발상이다. 또한 21세기 역량들을 학습하기 위한 방안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는 것도 실제적인 면에서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는 21세기 역량을 강조함으로써 교육과정에서 지식을 제외하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교육과정에서 지식을 제외하면 학생들이 21세기 역량을 학습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다.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발견을 계속하지만 새롭게 발견된 것들 중에는 대다수가 기존에 존재한 것들과 전혀 다르거나 대체된 것이 아니다. 하늘 아래 그 어느 것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그래서 창조는 모방의 모방이라고 하지 않는가. 수학의 경우를 보자. 과거 이론이 수정되는 경우가 다른 학문에 비해 훨씬 적다. 예컨대 유클리드 정리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이 현재까지도 타당한 것으로 존재한다. 이는 현재도 변함없이 인정받고 있는 지렛대의 원리가 2000년 전에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인정받았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를 두고 뉴턴(Newton)은 위대한 과학자는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제 교육에서는 오래된 지식일수록 더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는 반대로 새로운 지식일수록 학교에서 가르치는 데 더 비판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역량 교육은 정반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갈수록 보다 최신의 지식, 현대적이고 최첨단 지식이란 것들을 주문 외우듯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최첨단에 해당하지 않는다. 20세기 초반에 많은 교육자들은 전통적인 교과와 지식을 버리고 실생활에 유용한 20세기 역량을 찾았다. 예컨대 20세기 초반, 미국의 존 듀이(John Dewey)는 경험 중심의 실용교육을 주장하며 이를 금과옥조로 삼았다. 하지만 세상에선 경험(經驗)에 입각한 철학적 이론이 이미 정립되어 있었다. 오늘날 프로젝트 학습법이라는 것도 미국과 영국에서 19세기부터 수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대두되었던 학습법 유형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현재 세계적으로 우수한 교육제도를 가진 교육 선진국들은 추상적인 역량이 아닌 교과 중심의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비판받았던 지식이 오늘날 최신 이론으로 보강되어 인정받음으로써 21세기 역량을 중시하는 교육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예컨대 최첨단 과학은 역설적으로 21세기 역량 주창자들의 주장과 정반대의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지식일수록 학교에서 가르칠 때는 더욱 비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검토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우리말은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백하지 않은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