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교단춘추] 세계시민으로 미얀마人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나누자
[전재학 교단춘추] 세계시민으로 미얀마人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나누자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1.04.04 2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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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인천세원고 교감
 

온 세상에 4월의 봄기운이 완연하게 대지를 휩싸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봄비까지 내려 푸릇푸릇한 새 싹들과 하얀 목련, 가로수에 즐비한 벚꽃들이 앞 다투어 자연의 모습을 하루가 다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이런 자연의 정취에 흠뻑 빠져드는 게 지구촌의 4계절이 완연한 북반구의 대지에서는 어느 한 지역만의 특정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토머스 엘리엇(T.S. Eliot)은 자신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이렇게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시인은 왜 잔인함을 느꼈을까?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요즘 4월은 정말 잔인한 달이다. 미얀마에서 들려오는 소식 때문에 더욱 그렇다. 21세기 밝은 대낮에 군부 '쿠데타'라니 말이다. 민주화된 세상, 정상 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언론을 통해서 전해지는 시위 진압 방법은 너무나 잔인하기 그지없다.

역사는 알고 있다. 과거 한국인들이 4⋅19와 5⋅18 민주항쟁을 통해 위대한 민주화의 승리를 쟁취했음을. 그뿐이랴. 장기간에 걸친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과의 투쟁에 수많은 국민의 아픔과 고통, 희생이 따랐음을. 그 후유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채 많은 사람들의 가슴 한 구석엔 분노의 응어리가 맺혀있음을 말이다.

다시 미얀마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와 같은 아시아 대륙의 미얀마 국민들이 군부 쿠데타에 맞서 목숨을 걸고 항거하고 있다. 도대체 지구상에서 21세기 백주대낮에 정권을 탈취하는 군부가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에 항거하는 수많은 국민들의 죽음을 무력하게 영상으로 지켜만 보는 것도 비정상적인 일이다. 왜냐면 이는 어느 한 나라만의 고립된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살아가는 지구촌 사람들의 책무성과 책임감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잔혹한 군대의 진압에 이미 수백 명의 사망자가 나왔으며 부상자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불과 며칠 전에 아니 몇 시간 전에 마이크를 잡고 대중 연설을 하던 대학생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이를 보는 한국인의 마음엔 역지사지의 입장으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이미 우리가 과거에 겪었던 유사한 참사이기도 하다. 날이 갈수록 미얀마 국민들의 국제사회의 관심과 도움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과연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니 그들의 고통과 실상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인가?

오늘(4.4) 부활절 미사에 참례하여 현지에서 한인(韓人)사목을 하고 있는 오병수 스테파노 신부님의 특별 기고문을 읽고 안타깝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현지에서 직접 답답하고 불편하고 분노와 슬픔을 느끼며 감내하는 심정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필자의 뇌리엔 즉시 과거 나치 치하의 마르틴 니묄러(1892~1984) 신부의 글이 떠올랐다.

“나치가 공산당원을 끌고 갔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공산 당원이 아니었기에/그들이 사회민주당원을 가두었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사회당원이 아니었기에/그들이 노조원들을 끌고 갔을 때/나는 항의하지 않았다/나는 노조원이 아니었기에/그들이 유대인들을 끌고 갔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그들이 나를 끌고 가려 왔을 때/항의할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군부의 폭력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미얀마 사람들은 얼마나 두려울까 생각해보자. 떨어지는 벽돌조차 막아주질 못할 안전모와 드럼통을 잘라 만든 방패에 목숨을 맡기고, 자비라고는 찾기 힘든 실전 경험이 풍부한 군인들 앞에 나서야 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현재 미얀마 사람들은 SNS에서 2008년 미얀마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람보4>를 보며 잔인한 장면으로 가득 찼던 그 영화를 2021년에 직접 경험하고 있다.

그들은 군부의 잔인함을 고발하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 ‘람보’가 나타나 통쾌하게 군부를 무찌르고 해방되는 그날을 희망하는지도 모른다. 과연 그들에게 ‘람보’는 누구일까? 이는 세계인을 향해 던지는 질문과 같다. 더 이상 무고한 시민들의 피의 대가로 해결되기를 옆에서 수수방관하거나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우리는 지구촌 가족이자 세계시민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얀마에서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스마트폰으로 찍어 SNS에 올리는 장면을 우리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은 ‘람보’가 아니라 우리에게 향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고 함께 아파해야 하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하는 이유이다. 아들을 잃고 시신 앞에서 절규하는 어머니의 영상을 보며 우리는 과거 우리 자신들의 민주 항쟁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절대 무관심하거나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들과 함께 연대하여 미얀마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는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아픔과 슬픔, 고통, 죽음으로 몸부림치는 미얀마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미래의 주역인 우리의 어린 청소년들에게 세계시민으로서 평화와 자유를 누리고 사랑하며 이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시민의식을 가르쳐야 한다.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닌 양,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은 어떤 합당한 명분이 될 수가 없다. 군부 독재의 참혹한 역사를 가진 우리가 먼저 나서 미얀마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다가서야 하는 것은 이 시대 지구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의 필연적인 운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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