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의 교단춘추] 학교는 비정치적 공간이어야 하는가?
[전재학의 교단춘추] 학교는 비정치적 공간이어야 하는가?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1.03.21 1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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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잔재학 인천 세원고 교감
잔재학 인천 세원고 교감

[에듀프레스] 우리나라에서 교육과 관련된 논의에는 항상 동반되는 단골 메뉴와 같은 규정이 있다. 마치 교육이라는 성(城)을 사수하는 철옹성과 같은 굳건함이 배어있다. 바로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라는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제4항이다. 이는 교원의 정치 중립 ‘의무’와 관련된 철칙처럼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사실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를 규정한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촉발하는 뜨거운 감자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엔 교육이 특정한 정치적 진영에 편향되고 비교육적 현상과 사상의 편중됨을 우려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학교가 비정치적 공간으로 간주되어 학교에서 행해지는 모든 교육활동이 정치와 무관하다고 믿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현실적으로 2020년, 대한민국은 만 18세 학생(속칭 고3)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이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 걸음 진일보한 정책으로 시민들은 환영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도 일각에서는 학교가 정치화되어 이념적으로 혼란과 분열을 조장하여 어린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학교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염려하는 바와는 달리 예상되는 혼란과 잡음 없이 총선을 치르며 지나갔다.

사실 교사가 수업 중에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학생들에게 강요하고 주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현실을 무시한 채 교사들의 정치 행위 자체가 학생과 학부모의 학습권을 무조건적으로 침해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망상이다. 이제 학생의 정치(선거) 참여는 학교 교육에서 새롭게 주의를 끌며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으며 결국 ‘민주주의’ 실현이란 교육의 책무성에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보면 우리에게 학교라는 제도가 생긴 이래 그것이 비정치적이거나 중립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과거에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나라 국가교육과정의 최종 목표는 민주주의 시민 양성이다. 이를 기억하는 대한민국 교사라면 유념해야 할 것이 학교와 교육의 ‘정치성’이지 ‘비정치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기계적인 ‘중립성’이 아니라 민주주의 시민의식을 지향하는 자세이다. 이는 곧 어떤 지식을 가르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실에서 오가는 지식이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명확히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같다. 따라서 “어떤 지식과 생각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라는 관점에서 모든 지식의 흐름은 정치적 이해득실의 관계망 속에 존재하게 된다.

“학교는 ‘정치적’인 공간이다. 교육은 ‘정치’ 자체다. 정치가 거세된 학교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허구의 공간이다. 정치 중립적으로 포장된 교육은 위선적이다. 정치 중립적 담론은 ‘정치중립주의자’로 가장한 정치‘꾼’들이 동원하는 정치적 방략의 하나다.” 이는 정은균(2017)이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 에서 주장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교사의 정치적 중립은 그들이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뜻했다. 헌법의 정치 중립 조항은 교사들이 정권의 나팔수가 되거나 권력의 시녀가 되는 것을 ‘헌법적’ 차원에서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자는 취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교사들에게는 종교의 중립성이 요구된다. 이는 <헌법> 제20조 제2항, <교육기본법> 제6조 제2항, <국가공무원법> 제59조의 2의 제1항에 의거한 것이다. 하지만 교사들이 사적 영역에서 개인적으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은 금지하지 않는다. 교사 개인의 종교 활동이 직무인 교육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넓게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교사 개인의 정치 활동의 자유 역시 마찬가지다.

교사들이 초•중•고에서 실시하는 교육은 민주시민의 양성이라는 목표와 관련되므로 정치적 성격을 갖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를 규제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낸 민주주의 지수 보고서 제목은 <후퇴하는 민주주의>였다. 공정한 선거와 시민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지만 그것이 완전하고 견고한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단언했다. 더불어 투명하고 효율적인 정부와 민주적인 정치 문화를 토대로 충분한 정치적 참여가 병행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학교와 교사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단연코 유럽에서 손꼽히는 독일의 민주시민교육에서 얻을 수 있다. 학교 안팎을 불문한다.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치교육은 <독일기본법> 제1조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적 자유, 제20조 자유민주주의 질서의 기본원칙과 구체적 실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학습하면서 정치 참여 능력을 기르는 것이 독일 민주시민교육의 목표다. 독일의 정치교육과 민주시민교육의 방침은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

첫째, 교화와 주입 방식의 교육을 금지한다. 둘째, 가르치는 사람의 의견을 학생들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셋째, 정치적 논쟁과 학문적 논쟁을 지속한다. 결국 정치사회적으로 논쟁 중인 사안을 교육의 장 안에서 활발하게 토론하게 하는 것이 주안점이다.

이제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단기간에 걸쳐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디지털화)를 이루어 낸 우리 대한민국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정치적 시민문화가 더욱 견고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선거권을 가진 교사와 학생이 건전한 정치 참여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를 보다 성장시키는 길이라 믿는다.

민주시민을 양성해야 할 학교가 교육의 정치적 참여와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글로벌 시대의 중차대한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사안은 없다. 그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는 관점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다. 학교는 늘 정치를 논하고 정치적 가치를 다룬다.

예컨대 최근에도 ‘요즘 아이들’로 대변되는 청소년 미성숙론은 ‘정치적’인 것의 대표성을 띈다. 청소년을 행동과 사고의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청소년 공포의 표출이기도 하다. 이는 엄격한 의미의 이론이 아니라 성인중심주의의 어른이나 사회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치적인 것이다.

대다수 국가에서 청소년 교육정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의무 교육 시스템은 청소년 공포론을 배경으로 나타난 것이다. 더 나아가 주요 훈육 방식 중 하나인 체벌이나 학교에서의 나이(학년) 구분 방식 역시 청소년 공포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교사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가에 따라 학생들은 민주시민이 되거나 정치사회적 문맹이 될 뿐이다. 학교는 결코 비정치적인 공간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학교에서 어떤 교사로 존재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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