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의 교단춘추] ‘일반고 살리기’ 위한 교육정책의 포퓰리즘을 재고(再考)한다
[전재학의 교단춘추] ‘일반고 살리기’ 위한 교육정책의 포퓰리즘을 재고(再考)한다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1.03.15 2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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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글 전재학 인천 세원고 교감
글 전재학 인천 세원고 교감

포퓰리즘(Populism)은 흔히 대중주의(大衆主義)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는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철학으로서, "대중"과 "엘리트"를 동등하게 놓고 정치 및 사회 체제의 변화를 주장하는 수사법, 또는 그런 변화로 정의된다. 캠브리지 사전은 포퓰리즘을 "보통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사상,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우리에게는 그동안 이 말이 다분히 부정적이고 선동적인 언어로 정적(政敵)들 간에 서로 힐난하는 수단으로 등장하여 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한국의 교육정책을 지배하는 확고한 하나의 경향임을 재고(再考)해야 한다.

진보적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신자유주의가 교육을 망쳤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1995년 5⋅31교육개혁을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 역사상 5⋅31교육개혁이 표방하는 ‘자율’이라는 가치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육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 정책은 개인(교사⋅학생)의 자율은 외면하고 기관(고교⋅대학)의 자율만 강조하는 기이한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 교육학자들이 주장하는 교과서 자율발행제, 교사별 평가, 학생의 과목 선택 등 ‘개인의 자율’은 25년 여간 거의 진전이 없는 반면에 자율형 사립고, 대입 자율화 등 ‘기관의 자율’은 이미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경제의 신자유주의 못지않게 한국의 교육정책은 바로 이러한 포퓰리즘에 의해서 정치의 지배를 받아왔다.

20세기 말 한국 교육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포퓰리즘 정책 세 가지를 재고해 보고자 한다.

첫째, 대학을 무분별하게 늘리고 대학졸업장을 남발한 것이다. 1995년 5⋅31교육개혁에서 ‘대학 설립 준칙주의’를 내세워 사립대를 쉽게 설립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그 결과 오늘날 ‘대학 같지 않은 대학’이 난립하고 있다. 대학 입학 정원이 학령인구를 추월하기 시작은 2021학년도부터 미등록 충원자를 모집하느라 대학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심지어 지원자의 꼴찌도 입학이 되고 있으며 이 또한 충원에 부족하기는 매한가지다. 이제 ‘벚꽃이 피는 순서로 대학 문을 닫아야 한다’는 말은 현실이 되었다. 둘째, 고등학교 학사 관리의 부실화를 초래했다. 특히 유급과 낙제를 없앰으로써 수업 시간에 잠을 자고 시험에서 0점을 받아도 ‘법정 수업일수’만 채우면 진급과 졸업이 가능한 현실이다.

이것은 서구 선진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서구 선진국에도 대체로 초등학교⋅중학교에는 유급이, 고등학교에는 낙제가 존재한다. 미국은 핵심 과목(영어, 수학)에서 성취도가 낮으면 졸업장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고, 유럽에서는 과목별로 낙제점을 받으면 학점이 인정되지 않거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셋째, 고교에서 인문계 정원 비율을 대폭 높였다. 이는 상대적으로 직업 교육을 받는 학생의 비율이 매우 낮은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2000년대 들어 인문계고의 명칭을 ‘일반고’로 변경했다. 문제는 간판만 ‘일반’고로 바꿨을 뿐 교육과정을 변경하지 않은 것이다. 즉, 여전히 인문계 ‘학문적’ 교육과정인 것이다. 그 결과 적성에 맞지 않는 학생과 공부에 흥미 없는 학생은 헛돌고 결국 자퇴를 하거나 학교 밖 청소년으로 전전(轉轉)하게 만들고 있다.

필자는 교직에 입문했던 1980년대의 인문계고와 2010년대의 인문계고(일반고) 사이에 그 구성원의 일반적인 성향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실감한다. 1990년대는 ‘교실 붕괴’의 임계점이었다. 그동안 엄청난 문화 충돌을 겪었으며 이는 온갖 청소년 문제를 유발하여 커다란 사회 문제화가 되었다. 학부모들이 인문계를 선호하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자녀를 대학에 보내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계는 왜 이러한 학부모의 요구에 호응했을까?

첫째,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산업정책의 실종’이다. 과거 박정희 정부의 산업정책은 실업계고를 육성해 산업 발전에 필요한 숙련노동자를 공급하였다. 당시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기능공으로 제조업 현장에서 능력과 보수를 높여가거나 대기업이나 은행에 취업할 수 있었고 심지어 실업계에도 명문고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새로운 세대의 관료⋅지식인⋅정치인들은 산업정책을 개발독재나 관치의 산물로 간주해 이를 방임했다. 이후 2000년대 후반까지 정부의 주요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다가 2010년 이후부터 마이스터고가 개교하고 2016년 국가직무능력표준(NCS) 교육과정이 도입되어 의미 있는 변화를 시도했으나 실업계 정원이 늘어날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둘째,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의 결과다. 한국의 교육정책은 정치 논리에 의해 움직인다. 정부는 학부모⋅학생의 인문계 진학 요구를 마구 허용하여 ‘일반고 황폐화’의 단초를 제공했다. 인문계고의 비율을 무분별하게 늘린 것은 교육 수요자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명분이지만 이는 중대한 정책의 실패다. 결국 신자유주의와 포퓰리즘의 결합이 일반고를 황폐화한 셈이다.

1990년대 ‘교실 붕괴’는 기존의 학교 문화와 새로운 세대의 학생 간에 나타난 ‘문화적 부조화’ 현상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인문계 교육과정이 적성에 맞지 않는데도 인문계고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제도적 부조화’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일반고 살리기’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수업⋅평가의 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각종 혁신학교에서 추구하는 참여형 수업이 입시를 위한 주입식 수업보다 학생들의 흥미와 효능감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왜 잠을 자는가? 답변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Engage me, or enrage me”처럼 학생을 수업에 참여시키지 않아 그에 분노하는 학생들이 저항의 수단으로 잠을 잔다는 것에는 숙고할 가치가 있다.

각종 혁신학교는 학생들의 배움이 유발하도록 즐겁게 배우고 행복한 학교생활을 병행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엔 학교별 교육과정의 특성과 그에 적합한 수업의 실행이 절대적이다. 둘째, ‘일반고’ 고등학교의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 ‘일반’이라는 이름 아래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즉, 일반 학생들이 다닐 수 있도록 학생이 선택 가능한 과목과 프로그램을 대폭 늘려야 한다.

2025년 고1부터 도입하겠다는 고교학점제는 학생 개개인에게 과목 선택권을 부여한다. 그러나 현재의 인문계(학문적) 교육과정을 그대로 둔 채 추진한다는 것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필수 과목’은 적을수록 좋다. 또한 필수라는 명목으로 강요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현실은 고교학점제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수능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셋째, 현행 ‘인문계’ 학교의 위상을 찾아야 한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일반고의 진입 문턱을 높이는 것이다. 즉, 일반고 정원을 줄이는 것이다. 현재 중학교에서 꼴찌를 해도 일반고 진학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일반고의 ‘교실 붕괴’는 언제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정책은 학부모의 민원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업계(직업계) 교육의 기회를 넓히고 이를 적극 권장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특성화고⋅마이스터고를 증설하고 정원을 늘리는 방법과 일반고에 위탁교육 형태의 직업교육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늘리는 방안이 병행되어야 한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목수⋅타일⋅미장⋅조적 등 건축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들을 고등학교에서 가르친다.

이는 곧 현재의 한국의 일반고에서의 직업교육의 편협성을 대폭 넓혀야 한다는 사고의 확장과 이에 따른 적합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넷째, 일반고에 과목별 낙제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 이로써 학생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선진국의 낙제 제도를 참고하여 한국 실정에 맞는 낙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수업 시간에 잠을 자고 시험에서 0점을 받아도 졸업장을 주는 포퓰리즘 정책을 단절할 수 있다.

이제 우리 교육은 ‘학교별 다양화’에서 벗어나 ‘학생별 다양화’로 가는 패러다임으로 교체해야 할 때이다. 그럼으로써 일반고에 다니면서도 충분히 다양한 교육 기회를 가질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현실적으로 과감한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정책들이 과감한 의식의 변화와 제도적 변화가 병행되지 않으면 ‘일반고 살리기’는 허공을 맴도는 영원한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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