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오지라퍼②] 내가 마주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이름’의 정인이
[敎오지라퍼②] 내가 마주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이름’의 정인이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1.01.08 2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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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오지락(五智樂) 교육칼럼니스트/ 교사

 

[에듀프레스] 기억(記憶). 경험을 아로새겨주는 기억은 축복이기도, 때론 형벌이기도 하다. 하나의 기억은 그 순간의 감정을 함께 저장한다. 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감정 곳간’에 마일리지 쌓듯 차곡차곡. 시간이 흘러서 ‘아, 뭐였지?’ 기억이 날듯말둣해도, 그 때의 감정은 오롯이 생각난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기본 감정을 다섯 가지로 나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기쁨이(행복)・슬픔이(슬픔)・까칠이(혐오)・버럭이(분노)・소심이(불안)가 바로 인간의 기본 감정이다. 행복을 빼고는 모두 부정적인 감정이다. 행복한 감정을 감정 곳간에 채워 넣기가 이렇게 어렵다.

학대는 ‘몸’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멍들게 한다

기억은 감정을 먹고 자란다.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해주는 행복한 기억이 많으면, 감정 곳간은 ‘행복’으로 가득 차올라 성장과정에서 겪게 되는 좌절・고통・스트레스에 대처하는 힘이 커진다. 웬만해서는 무너지지 않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도 다시 치고 올라온다.

반면 두렵고, 무섭고, 슬픈 기억이 많다면, 감정 곳간 역시 불행한 감정으로 채워진다. 작은 스트레스에도 쉽게 좌절하고, 도망가고, 포기한다. 바람 빠진 공처럼 회복탄력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학대’는 몸뿐만 아니라 삶과 감정까지도 멍들게 한다. 정서적 성장 역시 멈추게 한다. 어린 시절 학대를 받은 아이들은 슬픔이(슬픔)・까칠이(혐오)・버럭이(분노)・소심이(불안)가 된다. 기쁨이(행복)가 끼어들 틈이 없다. 기쁨이가 다가와도 멈칫거리다가 결국 받아들이지 못하고, 먼저 도망간다.

얼마 전, 우리 학교 학생 한 명이 “선생님, 올해 처음 친구가 생겨서 너무 행복한데, 이런 감정을 제가 누려도 될까요? 오래 갈 수 있을까요? 너무 겁이 나요”라며 불안해했다. “놓칠까봐 겁나고 그래서 자꾸 집착하게 돼요. 그런데 이런 거 아이들이 싫어하잖아요. 그러다가 그 아이가 떠나가면 어떡해요”라며 울먹였다.

비록 지금은 멈췄지만, 이 아이도 학대를 받았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불안하다고 했다. 학대는 이렇게 아이들의 삶 전반을 점령하여 삶을 무너뜨린다. 평범한 가정에서 안전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처참함’이다.

‘정인’이는 내가 마주했던 학생일 수도 있다

‘정인’이 기사를 접할 때마다, 참담함과 동시에 책임감을 느꼈다. 사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정인이는 학교 구석구석 숨어있을 수 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 반에 한두 명씩. 다만 아직 발견되지 못했을 뿐.

만약 정인이가 구생일생으로 살아남아서 학교에 입학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매사 자신감 없고, 소심하고, 주눅들어있고, 손톱을 물어뜯고, 불안해하는 아이? 걸핏하면 화를 내고,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하고, 충동성이 강하고, 매사 짜증을 내는 아이? 아니면 자기표현을 하지 않은 채 뭐든 양보하고, 참고, 견디면서도 애써 웃어 보이는 착한 아이?

분명한 것은 마음까지 건강한 아이는 아니었을 거다. 뭔가, “쟤는 왜 저럴까?”라는 의문점을 갖게 하는 아이. 너무 조용해서 눈에 띄지 않았거나, 너무 많은 문제행동을 일으켜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아이였을 수 있다.

나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외면했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 아이. 아침조회시간 학급에서, 수업시간 교실에서, 쉬는시간 복도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를 그 아이가 ‘또 다른 이름’의 정인이였을지도 모른다.

교사 앞의 학부모와 아이 앞의 부모 모습은 ‘같지 않을 수 있다’

아동학대 신고의무자인 교사는 어떤 마음으로 슬픔이・까칠이・버럭이・소심이들을 만나야 할까? 종종 후배교사들에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학부모의 모습과 아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라고 얘기하곤 한다.

담임교사 앞에 서있는 학부모는 술에 취해있지도, 화가 폭발해있지도 않은 상태일 가능성이 많다. 전화통화로 확인했다면 더더구나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부모와 매일 저녁을 함께 하고 있을 수 있다.

아이의 말을 먼저 믿어야 한다. 부모님의 말을 의심하며 확인해야 한다. 거짓말에는 분명 허점이 있다. 학대가 확실하다면 주저하지 말고 신고해야 한다.

‘학대’하는 부모는 이해대상이 아니다

더불어 절대로 아이들에게 ‘부모를 이해하라’고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학대하는 부모는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부모님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거라’며, ‘부모님도 사람이라서, 힘들어서 그런 거니까 네가 이해해보라’고 하거나, 이런저런 것들이 부모님 심기를 건드렸을 수 있으니, 네가 더 좋은 자녀가 되기 위해 노력해보라는 조언은 아무리 좋은 의도로 건네는 말이라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될 말이다.

학대하는 부모를 이해하는 순간, 그 아이도 괴물로 자란다. 잘못하면 때려도 되고, 기분 나쁘면 욕해도 되고, 심심하면 괴롭혀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더불어 이 아이가 어떻게 행동을 다르게 하더라도 학대하는 부모는 멈추지 않는다. 학대는 ‘당하는 아이의 태도’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돕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외면하지 말자고, 외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돕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가끔 자신이 어찌해 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저 위로해주고 넘어가거나, 상처가 보여도 애써 외면하는 경우를 본다. 나쁜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다.

또 어떤 경우는 ‘괜찮겠지, 설마’하면서 혼자 판단하고 넘어가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다가 시간이 흐르기도 한다. 혼자서 판단이 안서거나 모르면 주변 선배교사나 기관에 물어보면 된다.

‘의심’을 품고 접근하고, 확인하다보면 서서히 ‘답’이 보인다. 그저 외면하지 않는 것만으로 아이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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