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열며① 송재범의 교육說] 그 많던 공감은 어디로 갔을까
[새해를 열며① 송재범의 교육說] 그 많던 공감은 어디로 갔을까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1.01.01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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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재범 서울 신서고등학교 교장
 

[에듀프레스] 2020년 12월 31일. 방학식을 마치고 인적이 없는 썰렁한 운동장을 한 바퀴 돌다가 문득 TV의 한 예능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선녀보살과 아기동자 캐릭터의 두 연예인이 다양한 방문객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언젠가 공부로 전국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고등학생 두 명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 이 둘은 친구였는데, 한 친구는 다른 친구가 슬픔과 연민, 미안함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걱정했다.

운동장에서 게임을 하다가 어떤 학생의 코뼈를 부러뜨렸는데, 그것은 우연한 사고이고 자신은 경기의 규칙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규칙을 어기지 않았으니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공감 능력의 부족이다.

이런 에피소드를 보면서 질문을 던져봤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공감적일까? 우리에게 공감 능력이라는 것이 실재로 존재하고 있을까? 이런 질문에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명저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이 떠올랐다. 애덤 스미스는 첫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상정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 원리들이 존재한다. 이 원리들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지켜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원리를 공감(Sympathy)이라고 보았다. 공감은 아무리 이기심이 가득한 인간이라도 다른 사람의 운명과 행복에 관심을 두는 것을 말한다. 애덤 스미스에게 있어서 인간이 가지는 공감은 본능적이며, 모든 이익에 대한 판단보다도 선행한다. 공감은 사회적인 본능으로 작용하는 보편적인 도덕 감정이다.

애덤 스미스의 묘비에는 그의 뜻에 따라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 여기에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 평소에 『도덕감정론』의 저자로 알려지기를 원했던 애덤 스미스... 인간을 자기 이익(self-interest) 추구의 존재 이전에, 공감이라는 보편적인 도덕 감정을 지닌 존재로 여기는 그의 방점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공감이 모든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부여되어 있다면, 왜 우리 주위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박완서)의 제목처럼 ‘그 많던 공감은 어디로 갔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근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관심은 사회경제적 불평등 심화에 따른 사회 정의의 문제이고, 그것은 교육 문제에도 그대로 전이되어 나타나고 있다. 2018년 학종의 공정성 시비 논쟁으로 대입공론화위원회가 운영되었고, 2019년 조국 사태는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차이에서 오는 불공정성에 대한 최고의 갈등을 표출시켰다.

그리고 2020년은 코로나 사태로 그러한 갈등들이 표면적으로 크게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원격교육으로 인한 학습격차가 발생하여 불평등과 정의의 문제가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고 있다.

2020년 연간 서울대생들이 교내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 1위가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면서도 서글픈 현실이다.

우리는 사회 정의, 교육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조희연 교육감이 말하는 ‘정의로운 차등’의 의미가 그렇고, 출발선의 불평등을 보정하기 위한 적극적 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교육 정의의 문제는 제도와 정책의 문제로만 해결될 수 없다. 오히려 자칫 교육 정의를 위해 도입한 다양한 정책들이 사회적 약자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편을 나누어 전쟁하던 것이 복잡성이 증가함에 따라 각자의 전쟁으로 변해버렸고, 그럴수록 개별로서의 약자들은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그대로 놔둔 채, 운동장에 여러 가지 선[정책]을 추가로 긋는다고 해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 지점에서 공감이 필요하다. 물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기 위한 사회구조적 개혁이 우선이다. 하지만 거기에 공감이 없다면, 그 개혁은 성공하기 어렵다. 운동장이 얼마나 기울어졌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공감대 형성을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감의 의미와 성격이 무엇인지는 다양한 논지(論旨)로 전개될 수 있다. 단, 이것만은 받아들이자. 애덤 스미스의 주장대로 공감 능력을 모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여덟 살 소녀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는 싱아는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다.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 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싱아처럼 그 많은 공감은 어디로 갔을까? 어렵게 살았던 옛날이 더 좋았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종종 듣는다. 서로 공감하며 살았기 때문이리라. 2021년은 교육에 있어서 공감 복원의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운동장에서 게임을 하다가 친구에게 부상을 입힌 고등학생이 다친 친구에게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안함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송재범 교육說]

송재범 서울신서고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교장

2020년 해체를 통한 교육의 재탄생이라는 의미에서 [송재범의 교육해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했다. 2021년부터는 [송재범의 교육說]이다.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말하는 ‘교육열(敎育熱)’이 아니라, 교육에 대한 기쁨[說]을 말하는 ‘교육열(교육說)’이다. 논어 첫 마디에 ‘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고 했듯이, 교육[공부]은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그런데 지나친 敎育熱과 경쟁으로 인하여 고역이 되어 버렸다. 이제 다시 교육[공부]을 기쁜 것으로 만들어가자는 의미에서 [송재범의 교육說]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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