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오지라퍼①] 완벽한 교사는 없다
[敎오지라퍼①] 완벽한 교사는 없다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0.12.21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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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오지락(五智樂) 교육칼럼니스트/ 교사

[에듀프레스] 오지라퍼(오지랖er). 오지랖이 넓은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다. 남의 일에 지나치게 상관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교사라는 직업은 필연적으로 오지라퍼가 될 수밖에 없다. 타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어 영향력을 줘야 한다고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선배교사들이 후배교사들에게 조언을 아낀다. 후배교사들이 자주 찾아와 이런저런 것들을 묻는다. 대답을 하면서도 ‘라떼는 말이야~’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닌지, 꼰대소리 듣는 건 아닌지 신경이 쓰인다.

어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벌써 고경력자가 되어있다. ‘덕분에’ 괜찮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용기 내어 본다. 이론과 현실의 차이에서 무수히 좌절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 오지랖을 펼쳐본다.

 

#1 보름. ‘다짐’의 유효기간이다. 작심삼일을 무사히 넘겼다하더라도, 임계점은 또다시 찾아온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며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그렇다면 내 몸에 베인 행동변화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풋(in put)의 양은 며칠일까? 최소 3주 즉, 20일정도가 지나야 ‘뇌’에 새로운 회로가 만들어 진다. 회로가 만들어졌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2달 즉, 60여일을 반복해야 ‘새로운 행동’은 ‘습관’으로 겨우 자리 잡는다.

하지만 불안하다. 언제라도 다시 이전 습관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임계시간’이다. 그럼 얼마를 더 반복해야 진짜 내 것이 될까? 심리학에서는 100일로 본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100일째까지 반복해야만 하나의 습관을 완성할 수 있다.

학교에서 100일은 어떤 의미일까? 총 수업시수가 약 190시간정도 되니, 절반의 시간이다. 즉, 100일은 한 학기 정도 된다. 결국 한 학기동안 꾸준히 노력해야 하나의 행동이 변한다. 자, 따져보자.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반 아이들을 파악하는데 3월이 지나간다. 4~5월이 되면 눈에 거슬리는 행동이 띄기 시작한다.

교육적 판단으로 ‘저것만큼은 고쳐놓겠다’는 다짐이 생겨난다. 6월, 야심차게 학생과 상담을 하면서 행동수정에 돌입한다. 그런데, 아뿔싸. 66일이 되기도 전에 ‘여름방학’이 돌아온다.

개학을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행동이 안타깝다. 9월, 다시 마음을 다잡고 행동수정에 돌입한다. 12월, 이제 겨우 성과가 나타난다. 정말 담임교사가 매일매일 정성을 다해서 아이를 관찰하고, 확인하고, 다시 추스르고를 반복한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게다가 그 녀석도 필요성을 절감하고 잘 따라줬을 때의 일이다. 하나 더, 이제 겨우 하나의 습관이 바뀌었을 뿐이다.

후배교사에게 묻는다. “그게 가능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후배교사가 새로운 다짐을 하며 말한다. “아, 그러네요. 다시 한 번 최선을 다해서 지도해 볼게요.” “어이구, 그게 아니라니까. 최선을 다해서 지도하지 말라고.” 후배교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뭘 어쩌라는 거냐는 눈빛으로 묻는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담임교사는 ‘알아차림’ 즉,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어떤 감정이 일어나는지 깨닫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너의 그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불편감을 주고 있고, 그로 인해 결국 너 자신이 어떠한 피해를 보고 있는지 충분히 알아차리도록 돕는 것만으로도 족하다(사실 이 과정도 쉽지 않다).

행동을 수정하고 안하고는 본인 몫이다. 끝까지 완성하느냐 못 하느냐도 본인 몫이다. 담임교사는 그 과정에서 적절히 격려하고, 다독거리고, 용기를 주며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최선 이라는 이름의 조급함

#2 이 과정은 매우 어렵다. 교사 이전에 사람인지라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좌절감·실망감·허탈감은 ‘괜히 시작했다’는 후회를 가져오기도 하고, ‘지금이라도 그만둘까’라는 포기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후배교사들이 이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어떤 후배는 그 다음해부터 애써 정을 안 주려하고, 어떤 후배는 쌘 척 하려하고, 어떤 후배는 수업에만 몰두하기도 한다. 그리고 ‘힘들고, 힘들고, 힘들다’면서도 아이들이 예쁘고, 돕고 싶다며 다른 방법을 찾아 헤매는 기특한 후배교사들도 있다(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3년 정도 쫒아 다니면 제법 아이들을 능숙하게 다룬다. 그 과정을 꿋꿋하게 버티는 후배교사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항상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하고 싶으면 온갖 수단과 방법이 생각나고, 하기 싫으면 온갖 핑계가 떠오르는 법이다. 행동수정을 할 녀석은 본인이 노력한다.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녀석은 아무리 교사가 발버둥을 쳐봤자 소용없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담임교사의 몫이 아니라 아이들의 몫이다.

‘내가 고쳐보겠다’는 다짐은 ‘조급함’을 가져오고, ‘조급함’은 ‘강요’를 불러온다. 순간 아이들은 거부감이 든다. ‘거부감’은 ‘실망감’으로 다가오며, ‘실망감’은 ‘나의 무능감’으로 돌아온다. 그러니 제발 고쳐보겠다는 다짐에 ‘최선’을 다하지 말자. 최선을 다했지만, 돌아오는 실망감의 충격은 교직생활 전체를 흔들어 놓을 수 있다.

그저 아이들에게 ‘잘못한 행동이 어떻게 되돌아오는지’ 즉, 잘못된 행동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설명해주자. 그리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알려주자.

우리 어른들은 매번 아이들에게 ‘해라, 바꿔라, 틀렸다’고만 할 뿐,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 왜 바꿔야하는지, 왜 틀렸다고 하는지 설명하는 것에 인색하다. 사실 이해하는 것이 우선인데 말이다.

‘good enough mother(이 정도면 충분한 엄마)’라는 말이 있다. 완벽한 부모는 세상에 없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려고 하니 엄마도 힘들고, 그 힘든 엄마를 보는 아이도 힘들다. 의도는 좋았으나, 둘 다 상처받는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교사는 없다. ‘good enough teacher’. 이 정도면 충분한 교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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