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범의 교육해체] 수능 마친 그대, "공부하자, 사람 사랑하는 공부하자"
[송재범의 교육해체] 수능 마친 그대, "공부하자, 사람 사랑하는 공부하자"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0.12.03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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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재범 서울 신서고등학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얘들아, 수고했다. 정말로 고생이 많았다.”

고등학교 교장으로서 수능을 마친 고3 학생들에게 해줄 말은 이것밖에 없다. 사상 최초로 가림막이 설치된 옹색한 책상 위에서 시험지와의 씨름을 마친 학생들에게 더 이상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들에게 다시 ‘공부하자’라고 권하고 싶다. 수능을 어렵게 마쳤는데, 곧바로 또 공부하자고 하니 이게 무슨 고문같은 소리란 말인가? 도대체 뭘 또 공부하자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제 수능 대비 같은 공부는 그만하자는 것이다. 수능을 위한 공부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것일 뿐, 이제부터는 진짜 공부, 공부다운 공부를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공부가 공부다운 공부인가? 한국인에게 공부하면 많이 회자(膾炙)되는 말이 다음과 같은 논어(論語)의 첫 구절이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

이 구절에 대해 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핵심은 공부 자체가 기쁘다[說]는 것이다. 배움과 공부에서 얻는 기쁨이 얼마나 크기에 논어(論語)의 첫 마디부터 등장할까! 그 기쁨을 논어(論語)의 다른 곳[子罕篇]에서는 욕파불능(欲罷不能)으로 표현한다.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다’는 말이다.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여건상 그만두려고 해도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지금의 수능 공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수능을 마친 고3에게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공부는 어떤 것일까? 다음의 세 가지 공부를 권한다.

첫째, 정답이 없는 공부를 하자. 수능에서 강요하는 정답 찾기 공부는 그만하자는 것이다. 공부는 뭔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르는 것이 있기에 그것이 뭘까라는 물음으로부터 공부는 시작된다.

따라서 공부는 원래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물음을 던지는 과정이다. 그것은 모르는 것에 대한 물음이고, 아는 것에 대해서도 물음표를 던지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묻지 않고서는 제대로 배울 수 없다. 질문이 있는 교실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수능은 공부를 질문의 과정이 아니라 정답을 찾는 선택의 과정으로 만들어버렸다. 선택도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매력적인 오답의 유혹을 물리치고 출제자가 정해놓은 한 가지를 정확하게 찍어야 한다. 국가에서 정답으로 공인해놓은 한 가지를 정확하게 찾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왜 매년 전국의 고3들이 배움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출제자가 마음에 두고 있는 정답을 찾아 사냥에 나서야 하는가? 정답을 찾을 때까지 잘못된 선택을 계속 붙들고 늘어지는 오답노트 공부전략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이제 정답이 없는 공부를 하자. 이미 정답 찾기에 익숙해진 학생들에게 이게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정답을 전제하지 않은 자유로운 배움의 과정에 혼란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공부의 대상인 세상은 수많은 현상과 의견이 있을 뿐, 모든 사람이 일치하는 하나의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굳이 답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선택이 아닌 물음의 방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쉼 없이 질문을 던지다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어떤 배움 또는 깨달음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답은 물음표 속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끈질긴 질문으로 물음표를 아래로 계속 잡아당기면 느낌표가 된다. 느낌표를 품고 있는 물음표가 도처에서 우리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

둘째, 다양한 언어를 공부하자. 우리는 공부하면 두 가지 방식을 떠올린다. 하나는 다방면에 걸쳐서 하는 공부, 즉 넓게 하는 공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어떤 분야를 심도 있게 하는 공부, 즉 깊게 하는 공부가 있다. 넓은 공부, 깊은 공부가 모두 필요하지만, 우선 넓은 공부로서 다양한 언어를 공부하자.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다양한 언어로 내뱉는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고, 니체(F. W. Nietzsche)는 ‘꿀벌은 밀랍으로 집을 짓고 살지만 사람은 개념으로 집을 짓고 살아간다’고 했듯이, 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람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학생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사용하는 언어[개념]들이 한정되어 있거나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떤 말로 해야할 지 몰라 답답해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많은 말을 하지만 같은 말을 중언부언(重言復言)하고 있음에 스스로 안타까워하는 학생도 많이 본다.

풍부한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육과정과 교과서라는 갇힌 공간에서의 한정된 언어들로 인해 사고(思考) 또한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 언어마저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글자대로 외워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다양한 언어들을 공부하자. 교과서에 갇힌 언어를 넘어 세상에 존재하는 엄청난 언어와 아무런 조건 없이 만나보자. 어려운 언어라고 피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가 풍부할수록 우리의 삶도 풍부해진다.

들뢰즈(G. Deleuze)는 개념이 곧 인격이라고 했다. 그 사람의 인격과 품격 수준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개념,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된다.

현재 우리 사회의 언어는 너무 무섭다. 관용과 이해의 언어보다는 정죄(定罪)와 혐오(嫌惡)의 언어가 넘친다. 수많은 풍부한 언어들이 편가르기 언어의 대표주자에 묻혀 숨을 죽이고 있다. 그 풍요로운 언어들을 이끌어내어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

셋째, 사람을 사랑하는 공부를 하자. 지금 우리 교육에는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코딩 등 미래를 향한 생존 전략들이 판을 치고 있다. 어디를 찾아봐도 따뜻한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내뿜는 따뜻한 사랑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미래를 얘기하면서 두 가지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하나는 인간이 인공지능과 공존할 수 있는 삶의 뉴노멀을 찾아야 한다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만의 고유한 장점으로 정서, 감정들을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인간만이 사랑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2001년에 개봉한 에이아이(AI)라는 영화에서는 미래의 지구에서 인간을 사랑하게끔 프로그래밍된 최초의 로봇 소년 데이빗이 등장한다.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 소년은 입양된 가정의 인간 엄마에게 시공간을 넘어서는 영원한 사랑을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동과 함께 섬뜩함도 느꼈다.

원래 사랑의 존재로 태어난 진짜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사랑이 점점 식어가고 있는데, 미래에 나타나게 될 인공지능들은 영원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니!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사람의 정서, 감정은 넘볼 수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인공지능의 사랑은 진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프로그래밍된 사이비 사랑일 뿐이라고 치부할 것인가?

사람을 사랑하는 공부를 하자.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공부가 필요하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람 경시의 사례는, 사랑이라는 정서 부족보다는 제대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자신의 출세와 생존을 위해서는 모든 자원을 투입하여 공부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공부는 언뜻 보면 어렵다. 수능 시험 과목처럼 교과서도 없고 공유화된 매뉴얼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 어느 공부보다도 쉽다. 특정 교과서나 매뉴얼에 얽매임이 없이 자기의 형편대로 자신의 방식대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평생 공부해야 할 항목에 사람에 대한 사랑도 포함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수능을 마친 고3들이여!

지금부터 정답이 없는 공부를 하자. 다양한 언어를 공부하자. 사람을 사랑하는 공부를 하자. 그리고 남아 있는 학생들도 이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우리 교육이, 우리 학교가 바뀌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학교는 정답이 아니라 물음표를 사고파는 시장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학교는 다양한 언어들을 만날 수 있는 만남의 광장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학교는 사람 사랑법을 공부시키는 사랑학 교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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