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편지] ‘코로나 성년식’을 치르는 수능생들에게
[선생님의 편지] ‘코로나 성년식’을 치르는 수능생들에게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0.11.29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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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호현 詩人/배화여중 교사
 

[신호현 시인/ 서울배화여중교사] "그랬지. 내가 '성년식'을 치르던 그 날은 진눈개비가 마구 쏟아졌던 11월 20일이었지. 그 때는 수학능력시험이 아니라 '대입학력고사'라 했어. 난 이천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이천에는 시험장이 없어서 성남에 가서 시험을 치러야 했지. 고등학교 운동장에 학교에서 마련해 준 버스를 새벽 6시에 타야 했기에 시골에서 읍내로 나올 수 있는 교통수단이 없어 읍내 친구네 집에서 자야 했지.

친구 부모님은 아들 같은 녀석들이 대여섯 명 찾아오니 얼마나 대견하고 반가웠겠니. 진수성찬 푸짐히 차리고 씻고 빨리 자라시며 뜨끈한 군불을 지피셨지. 부모님의 사랑만큼 어찌나 방이 뜨거웠는지 젊은 혈기에 우리들은 이불을 걷어차고 잤지.

시험 날 우리는 친구 어머님의 따스한 북어 국물에 밥 말아 먹고 학교 운동장 어둠 속에서 버스를 탔지. 버스를 타고 새벽 거리를 달려가는데 창가에 하이얀 눈이 부딪혀서 금새 물방울이 흘러내리더군. 그때는 그 물방울의 의미를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지금의 나를 있게 도와주신 부모님, 선생님들의 보이지 않는 눈물방울이었네.

그때는 저마다 잠에 취해 학력고사를 보러 가는 줄도 모르고 꿈속에서 흔들거렸다네. 1시간 정도 달려 버스는 어느 여고 입구에 도착했는데 고등학교는 언덕에 있었고, 거리 가로수엔 붉은 단풍에 살짝 내린 눈이 쌓였지.

'인디언들의 성년식'을 살펴보면, 옥수수 밭에서 가장 큰 옥수수 따기를 성년식으로 치르는 부족이 있단다. 옥수수 한 개 따는 것이 무슨 어려운 일일까 생각하겠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단다. 가장 큰 옥수수를 따기 위해 한 번 밭고랑을 지나가면 지나온 곳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한 번 옥수수를 따면 더 큰 옥수수가 나타나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란다.

그러면 인디언 아이들이 가장 큰 옥수수를 골라 오리라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리 좋은 옥수수를 고르지 못한다는 것이지. 이런 성인식을 통해 한 번뿐인 우리의 인생에 선택과 결단의 중요성을 가르치려는 것이리라. 인생의 숱한 선택에서 더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곁에 있는 좋은 기회를 지나치면 결국 인생의 결과는 별 볼일 없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란다.

'인디언들의 성년식' 같이 우리나라 고3 수험생들과 재수생들은 저마다의 다른 처지에서 수능을 치르겠지. 어떤 친구는 섬에 살아 수능을 치르려 하루 전 날 육지로 나오기도 하고, 산 속 오지에 사는 친구는 읍내로 나오겠지.

외국에서 이주해온 친구들은 아직도 낯선 한국어로 시험을 치룰 것이고, 탈북한 친구들은 미처 배우지 못한 내용들을 보면서 황당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룰 것이고, 사고와 질병으로 병상에 누워 시험을 치르거나, 심지어는 코로나의 확진 속에 격리된 환경 속에서 시험을 보겠지.

하이얀 방호복을 입은 학생이 시험을 치르고 하이얀 방호복을 입은 감독관이 감독을 하는 눈물겨운 환경 속에서도 '우리의 성년식'은 거행되겠지.

너희들이 '코로나 수능' 1세대로 시험을 잘 치르길 바란단다. 이 성년식에 통과하기 위해 폭풍 치는 바다를 건너고, 험한 산을 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시험이 없는 곳으로 가지 말고 시험이 있는 곳으로 가라. 산 넘고 물 건너서라도 당당히 시험을 향해 달려가거라. 앞으로의 삶에 이보다 더 큰일들이 없으면 하고 바람을 갖겠지만 시험은 어쩌면 가장 최소한의 통과의례란다.

수능은 어려운 대학공부를 잘 수행할 수 있는 기본적인 내용을 테스트 하는 것이고, 자격증 시험은 그 자격을 얻기 위한 기본적 내용을 검증하는 것이란다. 그러니 공무원 시험을 통과했다고 훌륭한 공무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초짜의 공무원이 되는 것이듯 교사도, 군인도, 의사도, 판사도 마찬가지란다.

그러니 시험을 통과했다고 우쭐해 하지 말고 겸손히 나가거라.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간절한 꿈도 함께 배려하며 더 멋진 대학생이 되어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홍익인간(弘益人間)형 인재가 되기를 바란단다.

아아! '코로나 성년식'을 치르는 너희를 보니 내가 성년식을 치르기 전 날 밤늦도록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시던 친구 아버님의 하이얀 웃음이 떠오른단다. 뜨끈한 국물의 식사를 새벽같이 지어주시던 친구 어머님의 미소가 떠오른단다. 그 분들은 대체 언제 주무셨을까나.

아들 친구들이 다 잠드는 것을 보시고도 아마 두세 번은 더 방 주위를 돌아보셨을 게지. 그리고 잠을 주무시는 듯 다시 일어나 새벽밥을 지으셨을 게지. 행여 아들과 친구들이 깰까봐 도둑 걸음을 걸으셨겠지. 아들과 친구들이 급히 비우고 떠난 설거지를 하시면서도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고 천지신명께 기도를 하셨겠지. 그런데 난 왜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그 분들께 감사하다는 생각을 못했지.

너희들의 성년식을 위해 수개월 전부터 문제를 출제하느라 가정과도 단절된 삶을 살아오신 출제위원들, 출제 보안을 유지하며 편집하고, 인쇄하고, 시험실별로 운반 보관하시는 보이지 않는 손길들…. 올해는 ‘코로나 수능’으로 보이지 않는 정보 유출로부터 보안과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시는 손길에 더욱 감사해야겠지.

신호현 서울배화여중교사
신호현 서울배화여중교사

찾아가 일일이 감사하다 인사를 못 드려도 모두가 ‘더 크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란다. 저마다 마스크로 웃음과 미소는 보이지 않겠지만 마스크에 커다란 웃음이라도 그려주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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