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춘추] “대한민국 입시,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죠?”
[교단춘추] “대한민국 입시,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죠?”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0.11.17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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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재학 인천 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올해 우리는 최근에 없던 엄청난 폭우의 피해를 자주 입었다. 이런 자연재해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모두가 머리로는 위기를 말하지만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못하는 것과 유사하다.

2019년에는 한 어린 소녀의 행동에 의해 세계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되었다. 그녀의 용기 있는 당찬 행동과 미래를 여는 지혜에 세상 사람들은 힘찬 박수와 격려를 보냈다.

미셀 오바마 여사는 “(트럼프처럼) 의심하는 자는 무시하라.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지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응원하기도 했다.

바로 18살의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201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그레타 툰베리의 이야기다. 그녀는 작년 <Time>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등장했다. 어떻게 해서 그녀는 이렇게 세계적인 인물로 주목받게 되었을까?

2019년, 툰베리는 유엔기후정상회의에서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나요(How dare you)!”라며 기성세대의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모습에 일침을 가하는 연설을 했다. 수많은 젊은 세대는 툰베리의 연설에 공감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대는 기성세대가 배신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미래 세대의 눈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우리를 계속 실망하게 한다면, 우리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 지금까지입니다. 더 이상은 참지 않습니다. 전 세계가 깨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변화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말과 함께 더욱 용기 있던 행동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마주치곤 그를 향해 눈을 부릅뜬 채 분노의 시선으로 응시하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이처럼 못난 지도자를 향한 저항과 비판의 몸짓이 그 어떤 것보다 감동적으로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이미 2018년 8월부터 “기후 위기에 대응하라”며 등교 거부 시위를 벌여온 툰베리의 목소리는 현재 전 세계 청소년들이 함께하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라는 거대한 움직임으로 발전한지 오래다.

눈앞에서 아이가 우물을 향해 기어간다면 당장 뛰어가 아이를 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는 맹자가 인간이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란 본능으로 표현한 바 있다. 기후 위기는 이와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겨야 할 절박한 위기 상황이다.

“위기는 우리가 그것을 위기로 여길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는 툰베리의 말처럼, 우리는 이 위기 상황을 얼마나 위기로 대하고 있는지부터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도 이미 ‘삼한사미’라는 사자성어가 그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다. 삼일은 춥고 사흘은 미세먼지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저 우리가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아무것이나 해도 되는 것도 아니다. 효과가 있는 방법을 찾아서 강력하게 실천해야만 한다.

장황한 겉 가지의 유사 사례를 벗어 던지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작금의 우리 교육의 상황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이다. 과거 1년여의 지루한 공청회의 과정을 거쳐 미온적이나마 발표된 교육개혁 조치는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다.

정부가 정시 40% 이상 확대라는 교육정책을 획기적인 변화인 양 발표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현장은 고교학점제의 정착을 위해 이에 걸맞는 교육과정의 운영을 위해 그동안 온갖 심혈을 기울여 애를 쓰고 있다.

고교학점제 운영은 이제 현 정부의 선거 공약에 머무르는 교육정책으로 끝나지 않고 미래 교육의 대세이자 ‘정해진 미래’로 맞이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교실에서 잠자는 학생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항간의 뒷말을 떠나서 이는 우리 교육이 가야 할 마땅한 길이기 때문이다.

또다시 대학입시의 계절이 진행 중이다. 요즘은 주말을 기점으로 고등학교마다 대학입시 수시전형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는 그동안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가던 전형이었다.

하지만 정시 확대 조치 이후에 사람들은 다시금 혼돈 속으로 빠져 왔다. 발맞춰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하는 사람, 다시 예전의 문제적 상황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분노하는 사람, 혹은 이러나저러나 큰 변화는 없다며 무심하게 하던 일을 계속하는 사람의 세 부류로 나뉜다.

그러나 다시 이렇게 정시 확대 조치로 회귀한 것은 사회적 빈부의 차이가 교육 격차를 더욱 조장하는 졸속 정책에 지나지 않는다. 특정 지역, 특수 학교의 학생들을 위해서 그들의 민원에 답하는 것으로 단지 ‘공성성 확보’라는 미명이지만 한 편으론 일종의 포퓰리즘적 처방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까지 교육 현장에 정착해 오던 수시 정책에 반기를 드는 조변석개(朝變夕改)식 조치로써 교육철학의 상실이 가져온 삼류 정책에 지나지 않는다. 고교학점제 전면 실행의 청사진이 정시와 조합이 될 것이라 믿는가?

현재 교육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위기인지 툰베리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교육이 얼마나 많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갔는지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지금 당장 주입식 입시 위주의 경쟁의 벼랑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을 구하자고 달려가는 사람이 없다.

정시를 확대해서 우리 교육이 무엇을 할 수 있냐고, 어떤 아이로 기르고자 하느냐고,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이 무엇이냐고 툰베리처럼 묻고 행동하는 사람이 없다. 위기를 위기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우물가로 기어가는 아이를 구하지 못하는 교육정책을 허용하거나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교육의 공정성’만이 교육개혁의 전부라고 믿는다면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교육에서의 진정한 공정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위기에서 아이를 구하는 완전한 교육개혁이다.

세계 교육선진국의 정책이 보이지 않는가? 오랜 기간 청소년 자살률 1위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하고 나아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시급한 교육정책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제는 그 답을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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