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주의 사이다 톡] 매일 등교 반대하면 아이들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송은주의 사이다 톡] 매일 등교 반대하면 아이들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0.10.24 0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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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은주 교육칼럼니스트
송은주 교육칼럼니스트
송은주 교육칼럼니스트

서울 소재 K 초등학교의 교사 O는 너무 답답했다. 거리두기 완화에 따라 등교수업 일수를 정하는 교직원 회의에서 주 5회 등교에 반대했다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교사”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경기도에서 근무하는 교사 S도 주 3회를 제안한 동료교사가 다른 동료교사에게 “아이들 생각은 안 하냐”는 말을 듣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주 3회에 동의한다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학습관리도 안 되고 가정에서의 온라인 수업의 한계가 커 주 5회 등교가 시급한데 그걸 반대하는 교사는 아이들을 위하는 생각이 없다’고 단정지어 버리는 일부 동료들의 강경한 태도 앞에서 그 부담감과 억울함을 덮어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주장 앞에서는 주 5회이든 주 3회이든 각자의 합리적인 근거가 무력하게 느껴졌다.

이런 일은 실제로 여러 학교에서 벌어졌다. 교육부는 300명 이하의 학교에서는 학교 구성원의 의견수렴 및 학교 여건에 따라 2/3 범위에서 등교수업을 할 수 있도록 학교에 자율권을 부여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자율권이 학교 안에서 실현되는 방법이 문제다. 학교 구성원의 문화와 지도성에 따라 진짜 자율권이 되기도 하고 합의를 압박하는 ‘강제권’이 되기도 한다.

등교수업은 필요하다. 원래는 등교수업이 기본이었으니 이런 말도 사실은 조금 어색하다. 어쨌든 아직 코로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주 몇 회 등교수업이 좋을지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실제 정책이 결정되고 운영되는 조직 차원에서는 얼마나 많은 갈등과 의견이 있을까. 그래서 회의가 필요하고 민주적인 대화가 절실하다.

하지만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 등교횟수가 논의되는 과정은 많은 경우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다. 권한 또는 주장권의 불균등분배로 인해 일부 구성원의 의견이 전체를 결정해 버릴 때도 많고, ‘사람이 이렇게 많아서 모든 이유를 다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이 여전히 만연한 탓이기도 하다.

학교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모든 이유를 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곳’이어야 하는데,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사실이 학교 구성원을 슬프게 한다. 회의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민주성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이미 여러 연구가 학교문화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열쇠는 교사에게 주어지는 ‘임파워먼트( 권한과 자율성)’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자율성이 있다는 말은 사람 수만큼 다양한 아이디어, 다양함을 고려해볼 수 있는 기회의 자유, 스스로 만든 기준을 적용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결정권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사들은 각자 주 5회를 해야 하는 이유, 3회가 나은 이유, 등교수업이 아직은 어려운 이유 등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회의에 참여하며 교육부와 교육청의 결정이 적절했는지 스스로 판단한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회의문화에서는 이러한 교사 개인의 자율성이 기본적으로 존중되고 신뢰받아야 한다. 특히 안전과 방역문제가 달린 등교횟수 관련 회의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막상 회의가 시작되면 발언권 등 자율성을 존중받지 못하거나 포기하는 이유는, 자신이 나름대로 세운 기준의 밑바탕을 합리성과 상관없는 이유로 ‘의심’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말이 바로 “학생들을 생각하면 당연히 매일 등교해야지, 주 5일이 싫다는 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학생들에 대한 사랑이 교사의 본분이라는 감정적인 측면, 사명감에 호소하는 말인 것 같아서 막상 들으면 쉽게 반박할 수 없다.

반박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괜히 나쁜 교사가 된 것 같은 오묘한 패배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이 말에도 오류가 있다.

첫째, 학생들을 생각하면 당연히 매일 등교해야 한다는 명제가 무조건 맞는 말은 아니다. 누군가는 코로나가 아직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고, 집단생활을 하며 사회적 거리두기가 거의 불가능할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면 집단생활을 줄이는 것이 학생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단지 학생을 사랑하는 방법의 기준이 다르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다른 것이다.

둘째, 주 5일이 ‘싫다’는 말과 ‘이성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은 다르다. 주 5일은 아니라고 하는 근거가 합리적인 이유인지를 따져보아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주 5일에 반대하는 교사의 의견을 단지 ‘싫다’는 감정적 프레임을 씌워 비합리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인지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의 주장을 한 마디로 단편화했을 때 빚어질 수 있는 오해를 우리는 매일 언론을 보며 경험하고, 그 오해는 뜻이 다른 누군가가 일부러 곡해한 경우일 때도 많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셋째, 교사의 판단 근거를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귀인하는 것은 전문가의 의사결정력을 믿지 않는 비합리적인 신념이다. 전문직을 규정하는 요건 중 하나는 그에게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의사결정력’이 있는지의 여부이다.

교사는 전문직이다. 교사들은 학생의 안전과 학사 일정, 교육과정 운영에 관한 전문지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만의 기준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때 어떤 합리적인 이유를 대든 상관없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가 보다’라는 말로 대응한다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그 자신도 전문가로서 판단의 기준에 대한 소양이 부족함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교사들에게는 매우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교사에게는 숙명이자 사명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의무처럼 느껴지는 무겁고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교사란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존재할 때 있을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만큼 ‘아이들’이라는 존재의 의미는 가벼운 말 몇 마디로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그런데 학교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종종 이 ‘아이들’이 본연의 무게감을 잃은 채 말하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합리화의 도구로 쉽게 쓰일 때가 있다.

민주성의 요소에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표현할 권리도 있지만, 자기 의견의 근거를 상대의 비합리적인 신념으로 곡해받지 않을 권리도 포함된다. 교사라면 모든 교육 활동과 결정의 근거에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동료들부터 믿고 알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교사에게 아이들이 갖는 존재감을 주장관철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학교 구성원 전체의 주의 깊은 관찰과 함께, 서로의 전문성과 책임감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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