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주의 사이다 톡] '교사 엄마'가 바라는 돌봄교실의 미래
[송은주의 사이다 톡] '교사 엄마'가 바라는 돌봄교실의 미래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0.10.17 14: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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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은주 교육칼럼니스트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 경동초등학교를 찾아 돌봄교실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 경동초등학교를 찾아 돌봄교실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필자는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엄마이다. 돌봄이 학교의 책임이 되는 상황에서 교사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를 아는 사람이자, 부모들에게는 일하는 시간 동안 자녀에게 안전한 돌봄이 제공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는 사람으로서, 무엇이 학부모를 불안하게 하고 교사를 무책임한 사람들로 만들며 혼란을 가중시키는지 찬찬히 짚어보면서 논의의 본질을 찾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이 돌봄의 바른 방향인가 생각해보기 위해 여러 정보를 오랜 시간 찾아보았다. 기사마다 한쪽 편만의 입장이 두드러져, 이 기사를 읽으면 교사들이란 학생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무책임한 공무원 집단처럼 느껴지고 저 기사를 읽으면 돌봄전담사들은 교사들에게 자신들의 업무를 떠넘기고 근무시간 연장과 처우개선만 바라는 이익집단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전국에 초등학교가 6120개(2020년 기준)나 되는데 그중에는 정말로 기사마다 사례라고 나오는,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일들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든다.

어떤 학교에서는 교사가 돌봄전담사가 해야 할 일까지 떠맡고 4명의 돌봄전담사를 관리하며 학부모의 민원과 전화에 수시대응하느라 본업인 교과 수업과 학급운영을 못 하는가 하면, 어떤 학교에서는 단 몇 시간 근무하는 돌봄전담사가 학교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혼자 고군분투하는 일이 전혀 없을 거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이해를 전제로, 돌봄 지자체 이관에 반대하는 입장의 근거와 필자가 알고 있는 학교 교사들의 현실, 교육 전공자이자 돌봄수요자로서 가지고 있는 인지적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돌봄을 둘러싼 논란의 본질을 정리해 본다.

첫째, 교사의 학교 교육 활동 이전에 돌봄은 지역에서부터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디언 속담에 ‘한 아이를 기르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온 마을’ 안에는 아이의 부모, 친지, 동네 어른들, 지역의 시설 등 인적·물적 인프라, 그리고 학교, 교사와 같은 교육 인프라가 모두 포함된다.

그러나 교사라는 직업은 산업혁명 이후 학교라는 다수 동시 교육 시스템에서 성취기준 달성이라는 일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전문적으로 양성되고 고용되는 전문직 종사자이다. 그 인디언 속담이 만들어졌을 때는 산업혁명 훨씬 이전이었을 것이며, 그때는 교사란 지금의 교사라기보다는 마을 구성원과 함께 보육을 병행하며 지혜를 전수하는 마을 지도자의 개념이었다.

실제로 북아메리카 지역의 인디언은 100년경 발생하여 부족을 이루며 살았고 추장 또한 마을 구성원으로서 지역의 인적 인프라 중 하나였다.

지금 교사에게 인디언이 살았던 문화를 기준으로 역할을 요구하기에는 사회는 너무나 분업화 전문화되었다. 지금 교사에게는 전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학급운영과 교과지도, 생활지도이다. 학생지도에 학생의 안전과 돌봄이 포함되지 않느냐라고 묻는다면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사실은 ‘돌봄과 생활지도는 다르며 학생지도는 학생의 안전과 돌봄이 전제된 상황에서 가능한 전문 활동’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매슬로우의 욕구위계이론이 그 근거를 말해준다. 매슬로우의 욕구피라미드는 후기에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 욕구가 더 상세히 분화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5단계로 되어있다. 피라미드의 가장 하위인 1단계가 생리적 욕구, 2단계가 안전의 욕구 3단계가 애정과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회적 욕구, 4단계는 타인과 자신에 대한 존경의 욕구, 가장 상위인 5단계는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이 욕구 피라미드는 한 인간 내면의 욕구 위계이기도 하지만 인류의 성장 과정이 거치는 욕구 위계이기도 하다. 아기가 태어나면 기본적으로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그 역할을 부모가 가정에서 가장 먼저 하고 그다음 아이가 집 밖으로 나오면 마을이 한다.

마을, 즉 지역은 아이가 두 번째로 만나는 세상이자 뛰어다니며 놀아도 안전함을 느껴야 하는 기본 생활 무대이다. 이런 욕구가 가정과 마을에서 충족된 가운데, 아이는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며 또래와 교사와의 관계에서 소속감과 사회성을 배우고 학교급이 올라가며 존경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자아실현을 추구한다.

교사는 학생의 사회성과 자아정체성을 바르게 일깨우기 위해 양성된 존재들로, 그들의 존재 목표가 달성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하위 두 단계의 기본 욕구가 충족되어 있어야 한다. 교사의 양성과 계약조건은 애초에 학생의 생리적 욕구와 안전이 이미 갖추어진 상태라는 뜻이다.

교사가 학생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안전에 신경 써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해야 할 교육적 목표가 궁극적으로는 학생의 건강하고 완전한 성장에 있고 교육과정 실행 과정에서도 혈기왕성한 학생들은 때때로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회는 교사에게 왜 돌봄과 학생의 안전까지 맡지 않느냐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가정과 마을에서부터 그런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교사가 아니라 부모의 마음으로 정리해보더라도 돌봄은 학생이 학교에 오기 전 기본적으로 가정과 지자체에서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엄마로서 아이가 학교에서는 전문적인 교사의 교육활동에 몰입하여 3, 4, 5단계의 상위욕구를 충족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사와 학생의 고차원적 욕구 추구는 단순한 교과지도와 지식 전수를 넘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다. 그 교사가 없는 학교 밖에서는 아무리 큰 돈을 지불해도 얻을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인류문화의 정수이다.

둘째, 돌봄의 지자체 이관은 안 된다고 하는 근본 이유는 돌봄이 교사의 본연의 역할이라서가 아니라 지자체의 안전망이 부족하다고 느껴 불안하기 때문이다.

지금 전국 지자체에는 어린 학생들을 수요자 수만큼 받아들이고 안전하게 먹이고, 보살필 수 있는 케어 센터가 부족하다. 최근에는 지역마다 아이돌봄센터 같은 소규모의 공간이 생기고 돌봄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누구나 가깝게 느낄 만큼 곳곳에 있지도 않고 인원도 소수만 이용 가능하다며 시간도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이용해본 부모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돌봄서비스를 학교 시설에 의존하고 16년 전 첫 돌봄교실의 시작도 학교 공간을 빌리는 형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린이의 돌봄을 위한 시설이 마련되지 않아 여전히 학교 시설에 의존한다면, 부모들은 교사가 아니라 지자체와 국가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시민으로서 투표와 참여로 끊임없이 책임을 다해왔는지도 돌아보아야 한다.

교사도 부모도 모두 시민이자 국민이기에 이것은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학교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도록, 꼭 부모가 일할 때만 찾는 한정적인 쉼터로 머물지 않도록, 지자체의 실제 환경을 개선해나가야 한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궁극적으로 지자체가 돌봄을 책임질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지자체가 돌봄을 책임지면 돌봄이 필요한 어린이와 그들의 부모인 시민들의 삶에 더 귀 기울이고 관여하게 된다. 최근 가정돌봄휴가가 10일씩 연장되는 등 일하는 부모를 위한 복지제도가 변화하고 있는 이유는 코로나로 인한 영향이 지자체와 국가에 직접적으로 와닿기 때문이다. 지자체와 국가는 와닿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다.

돌봄이 지자체의 책임이 되고 부모들과 직접 접촉하는 상호작용이 늘 때 지자체와 국가는 그 시선을 비로소 느끼며 돌봄서비스와 복지제도를 계속 개선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돌봄이 학교에만 머물면 돌봄에 대한 관심과 복지에 대한 요구는 학교 안에 가두어지게 된다.

정말로 온 마을이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세상이 되려면 돌봄이 학교만의 과제가 아니라 사회적 과제가 되도록 꺼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셋째, 돌봄이 교사의 업무가 되어 힘겨움을 느끼면 학생들 역시 그 피해를 입는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그 피해를 입고 있다.

학생이 학교에 있으면 무조건 안전하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교사가 자기 학급에 집중하지 못해서 본의 아니게 방치될 때, 그 학생들은 모두 위험에 노출된다.

돌봄업무를 맡은 교사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걸리거나 병가를 내는 이유는 온갖 전화와 민원이 힘들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을 감당하느라 정작 자신의 학생, 학급 관리가 안 돼서 오는 스트레스가 크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돌봄업무가 학교 문화나 구성원에 따라서 업무의 경중이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학교에 속해있으므로 그 업무를 담당하는 교사는 존재한다. 때로 교사들은 돌봄전담사가 개인사정상 출근하지 않은 자리를 메꾸기도 하고, 돌봄교실 전체 시스템 운영과 돌봄전담사와의 협력, 학생 관리를 하느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런 현실에서 교사가 천직이라 느끼고 소명의식과 성직자관을 가지고 임했던 교사가 이제는 노동자관을 추구하게 되었다며 노조에 가입하는 사례가 실제로 있다. 정책 하나가 한 교사의 교직관과 교원으로서의 활동까지 바꾸어놓은 셈이다. 교사의 교직관은 교사의 태도와 교육활동 전반에 영향을 미치므로 이러한 변화가 주는 메시지를 사회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아이 담임선생님만 그 업무를 맡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기에는 돌봄업무가 학교 문화에 주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돌봄업무에 지친 교사가 결국 병가를 내거나 업무조정이나 협력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으면 그 결과가 주변 교사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돌봄업무는 보통 기피업무로 여겨지고 업무 분배 과정에서도 갈등이 자주 생긴다.

교사들이 돌봄업무를 담당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는 사회에서 아이들을 위한 돌봄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적절하지 않은 업무에 항의하고 돌봄 인력에 대한 분명한 역할 구분과 책임감 있는 운영을 요구하려는 것이다.

사회가 변하므로 교사의 역할에 돌봄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로 인한 그 변화 때문에 교사는 교과지도와 생활지도에 몰입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지원을 받아야 한다.

코로나 이후 학교 정상화를 걱정하고 학생들이 결과적으로 평등한 교육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교사가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는 전문성으로 학생과의 학습활동에 몰입할 수 있도록 업무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돌봄의 개선과 사회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보다는 긴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 지금 당장 돌봄교실 하나가 부족하고 아이를 당장 맡겨야 하는데 무슨 미래인가하는 조급함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급하다고 임시방편만 세우다 보면 장기적으로는 사회와 교육, 무엇보다도 그와 함께 살아갈 아이들은 갈 곳을 잃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보아 왔다.

지자체와 국가에도 시도하고 개선할 시간과 기회가 필요하다. 근본적으로 더 안전한 환경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요구하고 기다려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지금 당장 학교에서 내쫓자는 것이 아니기에 지금부터 지자체 이관 과정에 들어가더라도 아이들은 여전히 긴급돌봄에 참여할 수 있고 양질의 서비스 확보를 위한 노력도 학교 안팎에서 함께 해나갈 수 있다. 어른들만 책임과 관찰을 놓지 않으면 된다.

송은주 교육칼럼니스트
송은주 교육칼럼니스트

무조건 교사들의 의중을 의심하고 사기를 꺾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교사 역시 학부모만큼 학생을 걱정하고 소중히 한다는 믿음, 교사이면서 학부모인 사람도 있고 교사만큼 교육을 위하는 학부모도 있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바라보며 올바른 돌봄의 방향을 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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