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범의 교육해체] 교육부와 코로나, "대책은 있어도 정책은 없었다"
[송재범의 교육해체] 교육부와 코로나, "대책은 있어도 정책은 없었다"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0.10.05 2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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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재범 서울신서고등학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등학교 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등학교 교장

이번 추석은 만찬이 아니라 반성의 시간이었다. 지난 반년 동안 코로나19의 재난 속에서 우리 교육이 대응해 온 내용들을 시간을 갖고 되돌아보았다.

코로나19는 교육부를 바쁘게 만들었다. 학교와 교사들을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고 학생과 학부모들을 애타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부는 바쁘게 움직였다.

교육부 홈페이지의 보도자료 코너를 보니 코로나19와 관련하여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간 100개에 가까운 보도자료가 탑재되어 있다. 약 2.2일당 한 번꼴로 코로나19 대책을 쏟아낸 것이다.

보도자료 없이도 수시로 내려보낸 공문들이 많고, 거기에다 교육부가 아닌 교육청의 수많은 대책과 지침까지 합쳐진다면, 최종적으로 학교는 얼마나 많은 요구들을 감당해야 했을까?

대책과 공문을 남발했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부는 나름대로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다. 수시로 대책이 나왔고 장관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학교 현장 방문 모습이 수시로 미디어에 등장했다. 일단 교육부가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모습은 읽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부의 대응 모습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첫째,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플랜이 없었다. 한 마디로 코로나19라는 사태를 맞아 교육부가 내놓은 것은 것은 교육 정책이라기보다는 교육 대책이었다.

교육 정책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차분한 분석을 토대로 목표, 수단, 성과 등에 대한 체계적인 그림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육부의 대응은 전체 그림의 어느 부분이 부족할 때마다 보충하는 보완 작업(대책)의 연속이었을 뿐, 제대로 된 그림 전체(정책)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교육부의 대응을 정책이라 부르지 못하고 대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시시각각으로 조여오는 코로나19의 위기 속에서 사안별로 신속한 대책들이 필요했다. 그 대책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의 대책들이 어떤 방향성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지 국민들이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제 개학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온 국민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고민하고 논쟁했다. 교육부는 이때 감염병에 대한 종합적인 미래 예측, 그리고 이를 반영한 등교 개학에 대한 원칙, 그리고 등교 개학이 늦어지는 경우를 대비한 장기적인 원격 교육 대책 등을 미리 준비했어야 한다.

개학을 언제할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개학을 하더라도 정상적인 학사 운영이 가능한 종합적인 방향과 지침을 마련했어야 한다. 이것이 교육 정책이다. 그런데 감염병의 추이만을 보고 있었다. 그에 따라 등교 개학일이 늦춰지고, 그것마저도 감염병의 추이에 따라 또 연기되는 사태가 반복되었다.

교육부는 지속적으로 대책을 내놓았지만, 교사, 학생과 학부모는 긴 호흡의 방향성을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또 사전 준비 없이 요구된 원격 수업 앞에서 교사들은 허둥지둥 댈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기존의 교육 패러다임을 고수하려고 했다. 코로나19는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교육부도 그 요구를 인식하고 있기에 변화의 요구를 반영하려는 의지도 보였다.

예를 들어 3월 초 「2020년 교육부 업무계획 보도자료」의 헤드라인은 “확실한 변화, 대한민국 2020! 국민이 체감하는 교육 혁신, 미래를 주도하는 인재 양성”이다. ‘변화’ ‘혁신’ ‘미래’라는 단어들로 변화 요구에의 호응을 읽을 수 있다.

“교육부는 2020년 교육현장에서 변화다운 변화를 만들고~”라는 수사(修辭)에서 보듯이 변화를 위한 결연한 의지가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당장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을 보면 그 화려한 수사만큼 실질적인 변화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건강이 우선이기에 개학을 서두르지 말자거나 수능일도 늦출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요구도 있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법정 수업일수 및 대입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수업 일수와 수능 일정이 절대 불변의 규칙인가? 오죽하면 한 토론회에서 “입시 일정, 법정 수업일수, 내신평가 등은 절대 상수인가?”라고 물을 정도였다.

이번 코로나19는 일시적인 사고(事故)라기보다는 정상 사고(normal accidents)이다. 즉 상호작용의 복잡성과 긴밀한 연계성이라는 세계 체제적 속성에 따라 불가피하게 발생한 사건이다. 문제는 이런 체제적 속성이 지속되는 한 유사한 사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코로나19 사태가 일회의 순간으로 끝날 것이라면 입시 일정, 법정 수업일수, 내신평가 등의 원칙은 그대로 고집해야겠지만, 지속적으로 예견되는 것이라면 고집해야 할 절대 상수가 아니라 융통성 있게 풀어야 할 변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육부는 그것에 대한 깊은 고민을 보여주지 못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수하려 했다.

셋째, 교육 수요자가 관람자요 수혜자의 모습이었다. 교육 정책의 최종 종착지는 학생이다. 따라서 교육 정책을 수립할 때는 학생에게 그 정책이 전달되었을 때의 결과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책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한 방법이 체계적으로 강구되어야 한다.

따라서 정책기획서마다 정책의 목표가 맨 앞에서 제시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주요 방침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그 정책들이 잘 적용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기대 효과가 희망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 희망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 정책이 최종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 그 정책을 수행하는 교사와 학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배려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19 대책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교사, 학생, 학부모들은 철저하게 관람자요 수혜자의 입장이었다. 전염병 추이에 따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부의 지침만 기다리고 있었다. 지침이 늦어질 것 같으면 왜 이리 늦어지느냐, 그리고 지침이 구체적이지 못하느냐고 따졌다.

원격 수업이 확대되면서 디지털 기기가 부족하다고 하여 교육부와 교육청은 기기 공급을 위하여 또 땀을 흘려야 했다. 교육 자치, 학교 자치를 외치는 시대에, 오히려 세세한 것 하나까지 교육부나 교육청에 더 매달리는 수혜자의 모습이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단위학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부족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단위학교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학교 경영을 해본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만큼 교육부나 교육청이 단위학교에 실질적이고 자율적인 학교 운영권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한다.

개학, 원격 수업, 평가 등의 학사 운영 등에 기본적인 원칙만 주고 대폭적인 자율권을 부여하여 학교가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시행하게 했다면... . 코로나19 대책에 필요한 추가 예산을 학교에 통합 일괄 배부하고 학교가 자율적으로 집행하게 했다면...... 그리고 교육부는 학교의 능력으로는 취약한 방역 대책에 더 집중했더라면... .

우리는 학교 혁신을 이야기할 때마다 학교와 교사가 혁신의 주체가 되어야지 혁신의 대상이 되지 말자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도 교육과정 운영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었다. 교육부가 묶어놓은 지침의 굴레 안에서 학교는 주어지는 지침을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없는 교육 개혁』(데이빗 타이악․래리 큐반, 1995)의 저자는 왜 외부인들이 제안한 혁신은 대부분 단명했을까를 묻는다 그 주된 원인은 학교를 하나의 복합적인 기관으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교사들의 문화를 통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냥 학교를 ‘요술 고무(silly putty)로 이루어진 곳’으로 판단하여 학교에 관한 정책을 쉽게 만들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학교는 요술 고무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살펴주었으면 좋겠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모두 열심히 교육했다. 교육부와 교육청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는 대책만이 아니라 정책도 세우자는 것이다. 미래의 큰 그림을 그려달라는 것이다. 무조건 따라오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제시해달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큰 그림(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참고할 만한 의견은 없을까? 서점의 한쪽에 무더기로 전시되어 있는 미래 관련 서적만큼이나 참고자료는 너무도 많다. 그 중의 하나 아마존 대표 제프 베조스가 제시한 “첫날 정신을 지키기 위한 필수 요소”라는 항목의 4가지 기업 운영 지침이 눈에 들어온다. 4가지 지침 중 교육 정책에서 시사점을 줄 수 있는 3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언스케일』, 헤먼트 타네자․케빈 매이니, 2018)

1) 고객에 대한 진정한 집착 : 탈규모화 시대에 성공하는 제품은 고객 1인에게 1인 시장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객을 깊이 알아야 하고, 아무리 작더라도 특정 수요에 완전하게 대응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대기업들은 대개 그러지 못한다.

2) 부차적 요소에 저항하는 것 : 규모화된 기업은 중요치 않은 일들을 관리하는 데 매몰되기 쉽다. 절차가 한 예다. 절차를 지키는 것이 주가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래서 결과를 살피지 않고 그저 절차만 밟으려고 애쓴다.

3) 외부의 추세를 받아들이는 것 : 큰 추세는 포착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대규모 조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가령 신문사들은 인터넷의 시대가 임박했음을 알고도 너무 늦을 때까지 온라인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 3가지 기업 운영 지침을 교육 정책 수립과 추진 과정에 다음과 같이 스며들게 해보자.

첫째는, 「고객에 대한 진정한 집착」이다. 우리에게 고객은 학생과 학부모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고객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심하게 말해서 교육부와 교육청, 학교가 특별히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학생들이 학교에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정책 결정은 언제나 공급자 중심이다.

거창한 기획서의 ‘주요 방침’에는 ‘학생과 학부모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학교 현장으로부터의 bottom up’이라는 단어가 표준어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 세부 내용 및 집행 과정을 보면 공급자 중심이다.

학생과 학부모, 더 나아가 교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정책 담당자의 기획 능력보다는 철저한 현장 이해가 필요하다.

좋은 정책은 고객인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와의 많은 대화 및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절실하게 요구하는 것은 정책 담당자의 창의성이 아니라 고객에 대한 ‘진정한 집착’이다.

둘째는, 「부차적 요소에 저항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교육부나 교육청의 정책 담당자에게 부차적 요소는 늘어만 간다. 요구사항이 많아질수록 교육부와 교육청의 조직은 점점 커져가기 때문이다. 조직이 커지다보면 절차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고, 각 부서별, 개인별 자율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점점 조직 사회에서 개인이 책임지지 않으려 하고 윗사람에 대한 보고와 절차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당장 고객(교육 수요자)에 대한 지원 실천보다 보고자료나 홍보용 보도자료 작성에 힘을 기울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부차적 요소에 과감히 저항해야 한다. 저항은 거부나 반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 수요자를 향한 본질적 고민이나 접근에 방해가 되는 비본질적이고 부수적인 것들에 대한 관여를 대폭 줄이고 없애자는 것이다. 교사가 수업이나 생활지도에 전념하기 위해 쓸데없는 일은 줄이자는 ‘교원업무정상화’도 이런 의미로 시작한 것이다.

상급자가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기 어렵고, 하급자가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절차를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고객에 대한 진정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면, 정책 담당자가 진정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대상은 보고 대상자가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다.

셋째는, 「외부의 추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외부의 추세를 받아들이자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더 이상의 긴 설명이 필요 없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한다. 외부 추세와 세상의 미래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석학들이 도움말을 주고자 경쟁한다.

우리가 오픈 마인드를 가지고 외부의 추세를 적극 받아들이려고만 한다면,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하는 사람은 많다. 포스트(post) 코로나를 넘어 위드(with) 코로나 시대에 부합하는 교육 정책 수립에서 외부의 많은 원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그 원군들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이번 추석에 가수 나훈아는 「테스형」을 소환하여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만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고 삶의 어려움을 내뱉었다. 내일이 두려운 것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과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일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때 더 두려운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교육 대책도 필요하지만 내일을 예견할 수 있는 교육 정책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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