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춘추] 교무실은 다도해(多島海) ..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교단춘추] 교무실은 다도해(多島海) ..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0.10.02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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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일찍이 미국의 오바마 전임 대통령은 틈이 날 때마다 '한국의 교육을 보라'고 미국을 향해 외쳤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첫째, 한국의 높은 교육열을 보았던 것이다. 둘째, 교사의 높은 수준을 인식했던 것이다.

교육열이야 세계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인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수준 높은 교사를 말하기에는 관점에 따라 약간의 이견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객관적인 자격 기준으로 볼 때 이 또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교대를 진학하는 학생들의 학력을 보라. 학교마다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전교에서 최상위에 들지 않으면 꿈을 이룰 수 없다. 사범대학 역시 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인재들의 집합체이다.

문제는 이런 유능한 인재들이 교육 현장에서 능력을 발휘하며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엔 부정적인 답변이 만만치 않다. 인재들의 무덤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회자되고 있는 곳이 바로 교직사회다. 왜 그럴까? 여기에 그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가고자 한다.

필자는 고등학교에서 오랜 대학입학을 위한 진학지도를 해 왔다. 해마다 수재들과의 상담에서 아쉬운 마음으로 되풀이 하던 말이 기억난다. 바로 한때 세계적인 대기업을 일군 경영계의 구루(guru)가 했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 때문이다.

비록 그의 마지막 삶의 여정은 다소 의외였지만 전성기에는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다국적 대기업을 이끌며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던 인물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인재는 세계를 대상으로 도전과 모험으로 가득 찬 삶을 개척해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라 믿었다. 좀 더 창의적이고 개척적인 그리고 인류에게 공헌하는 삶에 적합한 것이 인재들의 역할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위 최고의 인재라는 학생들이 교사가 되겠다고 꿈을 갖는 이유가 너무도 한심했던 것이다. 그저 철밥통 공무원으로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이유가 거의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한두 해를 넘어 지속적으로 이런 생각은 계속되었다.

물론 개인적인 가치관이라 조심스럽게 학생들과의 상담을 진행했고 절대 강요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정관념으로 무장하여 요지부동의 자세로 일관하거나 진취적인 사고의 확산을 거부한 채 오직 안정적 직장만을 고집하는 수재들에게 적잖은 실망을 했다.

필자는 지금도 만약 그들이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을 떨치기 어렵다. 왜냐면 교직은 아이들과 공동체를 사랑하고 아이들의 보편적인 심리와 발달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나아가 끈기와 인내심이 강하며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사람에게 더 적합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학창 시절 내내 모범생으로 공부만 해온 학생들은 전형적인 몇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사고의 영역이 좁다. 행동은 매우 성실하나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상당히 강하다. 즉 타인의 의견이나 생각을 수용하거나 논리적으로 따지지 못하고 감정적 판단이 앞선다.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생각이 학력에 비례하듯이 우월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학교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청소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은 또 다른 노력으로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어려움에 직면하면 이를 끝까지 돌파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나약한 생각으로 상처를 받기가 쉽다. 왜냐면 그들이 살아온 생활의 과정과 문제를 유발하는 학생들의 그것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학교에선 학생과 교사 사이에 수많은 갈등이 노출되고 이는 곧바로 학생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학부모의 민원으로 연계되고 있다.

그 사연을 분석해 보면 결론적으로 교사가 너무 학생의 성향을 모르고 또 교사의 한 가지 기준이나 가치관에 따라서 학생을 지도하기 때문이다.

소위 모범생이 문제 학생을 이해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세상에서는 이를 속되게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잘 안다”는 말로 비유하지 않는가? 그래서 유유상종, 동병상련, 측은지심이란 말이 회자되는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학생과 그의 문제를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지도하려는 의지 내지 교육적 사명감 또한 교사의 우수한 학력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 사이엔 상호 교류와 실패로부터의 경험을 공유하는 시스템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은 이 또한 녹록치 않다.

오늘날 교무실에는 수많은 고독한 섬들이 존재한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무용 책상들이지만 교사와 교사의 사이에는 공간의 거리를 뛰어넘는 훨씬 이상의 사회적 거리가 마치 다도해(多島海)를 연상시킨다.

각자의 교육활동에 자율성이 주어지고 업무 분장이 이루어지는 관계로 특별한 사항이 아니면 개별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러니 부서에 따라서는 출근 후에 퇴근 시까지 아침에 나누는 형식적인 인사(그마저 생략하는 경우도 있음) 외에 한 마디 말을 나누지도 않고 퇴근하는 경우도 있다. 업무를 놓고 서로 자신의 담당이 아니라고 갈등이 빈번하다.

매년 새로운 업무가 생기기도 하는데 이를 관례적으로만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사업은 경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소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것이다.

이런 경우 학교와 교사들 간의 분위기에 따라서 서로 공조체제를 잘 이루어가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엄격한 선을 그어 관습에 따른 담당 업무 이외는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관리자는 교직원간의 인화, 원만한 업무의 협조와 공조체제를 조성하는 조정능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비교적 협조 체제를 잘 유지하는 부서도 있다. 대개는 학년 교무실이 그렇다. 그곳엔 학년이라는 큰 공동체 운영이 우선적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학급 간의 공조를 유지하려 협조한다.

실제 학급 담임 간에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사실을 인식하고 내 반, 옆 반이라는 명확한 구분보다는 학년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가려는 열린 마음이 존재한다.

행여나 어느 담임교사가 자기 반만 챙기고 타 학급보다 빨리 가려는 경쟁의식을 보이면 결국 이는 자기 학급의 학생들에게 유형무형으로 피해가 가기 때문에 조심하려는 의식이 있다.

학교에 따라서는 행정업무 담당부서도 부서장의 역할에 따라 단합이 잘 되어 서로 공조체제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는 특별히 부서장의 리더십이 눈에 띄기도 한다. 그래서 그 부서는 새로운 업무가 주어지면 서로 조금씩 나누어 하거나 아니면 함께 공동으로 처리하여 갈등을 사전에 차단하기도 한다.

이처럼 서로 도우며 협조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잠시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린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한다.

어느 겨울, 한 남자가 눈보라를 맞으며 산길을 걷고 있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어두워져 그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추위와 배고픔과 길을 잃은 두려움에 처해 있을 때 우연히 다른 남자를 만났다. 둘은 서로 의지하며 길을 헤쳐 나갔다.

그런 와중에 추위에 쓰러진 한 사람을 발견했다. 아직은 온기가 남아 살아있었다. “우리 이 사람을 업고 같이 갑시다. 아직 살아 있어요.” “지금 우리가 몸 가누기도 힘든데 어떻게 이 사람을 데리고 갑니까? 어차피 이 사람은 가망이 없어요.”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한 사람은 먼저 떠나갔다.

남은 사람은 그 사람을 업고 따라갔다. 무거워 온몸에 땀이 흘렀다. 마침내 저 멀리 마을을 발견하여 그곳으로 가고 있는데 어느 곳에 이르자 먼저 출발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다. 추위에 쓰러져 죽게 된 것이다. 반면에 뒤에 온 남자는 서로의 체온 덕분에 추위를 이겨내며 마침내 살 수 있었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를 보탠다. 영화 ‘팀 호이트’이야기다. 이는 아버지 딕 호이트와 아들 릭 호이트 부자를 일컫는 말이다. 아들은 태어날 때 탯줄이 목에 감겨 산소 공급이 되지 않아 뇌성마비를 얻게 된다. 말도 못하고 몸을 가누기도 힘든 릭은 컴퓨터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릭이 열다섯 살 때 컴퓨터로 처음 한 말은 ‘달리고 싶다’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휠체어를 탄 아들을 끌고 달리기 시작한다. 달릴 때 장애가 사라지는 느낌이라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더 큰 도전을 한다. 바로 마라톤 도전이다. 수많은 연습과 도전으로 마침내 마라톤 완주에 성공하여 팀 호이트라는 이름으로 보스톤 마라톤에 출전해 2시간 53분 20초에 완주하게 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철인 3종 경기. 미국 대륙 횡단 등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해내며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없었으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릭, 네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하지도 않았을 거야.”

우리의 삶은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할 때 거대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무실에서 혼자 하는 것보다 동료 교사와 함께 할 때, 학교 전체가 함께 할 때 추진력과 영향력이 크다. 우리 사회는 이미 이를 입증했다.

1998년 IMF 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 등 하나 된 대한민국의 위대한 힘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기 위한 공동체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인가? 학교내외의 교사들의 독서토론 클럽이나 전문적 학습 공동체(일명 전학공) 활동으로 서로 수업이나 생활지도 상의 경험을 공유하고 나눔을 통한 수업 전문성 함양 및 회복적 생활지도능력 함양 등을 이룰 수 있다.

혼자서 가는 ‘우물 안 개구리’는 마치 실험실 비커에 담긴 것처럼 서서히 덥혀 오는 물의 온도를 느끼지 못하고 뒤늦게 파멸을 맞이한다. 이를 통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도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교사는 학교 내외 집단지성에 참여하려는 열정을 가질 필요가 있다.

여기엔 노력이라는 용기와 자기 시간의 희생이 필요하다. 뜻이 맞는 교사끼리는 확실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즉 자기계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정책적으로 학교 내외에서 교사들의 다양한 모임을 적극 장려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 선생님들은 어떤 새로운 환경에서도 이를 극복할 역량이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상 초유의 경험을 우리 선생님들은 잘 극복하고 있다.

2020년, 짧은 시간에 이루어내는 교육환경의 변화를 보라. 시작부터 완전할 수는 없다. 실패로부터 배우는 회복탄력성은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 속에서 교사는 ‘혼자보다 함께’하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혼자서는 빨리 갈 수 있을지 몰라도 지쳐서 멀리 가지 못한다.

인생 100세 시대, 누구나 함께 멀리 가야 할 운명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 소풍을 끝내는 날, 우리가 살아 온 세상이 참으로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는 시인의 마음이 필요하다.

교직에 종사하는 교사는 이 보다는 조금 더 특별하다. 교사는 분명 한명 한명이 인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한명 한명은 혼자서는 단지 모래알 하나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래알 하나하나가 모이면 해안가의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그 해안가에서 교육공동체가 즐겁게 뛰어 노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은 이제 교직의 모토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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