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 학교는 자유의 광장(廣場)이 되어야 한다
[교육칼럼] 학교는 자유의 광장(廣場)이 되어야 한다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0.09.24 08: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 전재학 인천세원고등학교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광장(廣場)이란 (1)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거리에 만들어 놓은, 넓은 빈터, (2) 여러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만나거나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실 광장은 우리에겐 아주 익숙한 문학 작품이나 역사의 현장과 연계되어 있다. 작가 최인훈이 지은 장편 소설 《광장》은 주인공 이명준을 통하여 우리나라 현대 소설에서 금기시되어 온 남북 간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고통받고 갈등하는 지식인상을 보여 주었던 작품이었다. 결국 전쟁포로에서 풀려난 주인공은 남, 북한 어디에서도 자유로운 광장을 발견하지 못하고 제 3국인 인도로 향하나 도중에서 바다에 투신해 자살하고 만다. 그뿐이랴. 광장은 도시의 중심부에 세워져서 본질적으로는 다용도 열린 공간이다. 그래서 시청광장, 시민광장, 도시광장, 공공광장, 플라자 등의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기능적으로 대다수의 도시광장은 시장, 콘서트, 기념, 정치적 집회, 종교 모임 등이 다양하다. 특히나 최근에는 국민 여론의 집결지이자 정치의 중심가라 불리는 광화문 광장이 국정농단의 심판을 이끌어낸 촛불혁명의 역사적인 장소로, 그 이전엔 광우병 파동으로 인한 국민적 저항의 장소로 정치사에서 굵직한 사건들이 진행돼왔다.

광장은 전술(前述)한 문학 작품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타인의 고통을 발견하고 그것에 공감을 나눌 수 있는 곳으로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한 발견과 공감은 ‘다름’에서 나오는 것으로 ‘같음’에서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연대가 중요하기도 하다. 그러려면 다양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야 한다. 모이면 다른 사람이 어떤 고통에 몸부림치는지 알 수 있다. 고통에 공감해야 다가갈 수 있는 삶의 현장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광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기적인 생각과 거짓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국민의 날 선 비판과 행동으로 왜곡된 신념을 허물 수 있는 곳은 광장밖에 없다. 그래서 광장에서는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왜곡된 신념을 바꿀 수 있고, 기존의 코드를 깨뜨릴 수 있다. 광장에서 만난 타인의 삶은 자신의 일상에 질문을 던질 것이며, 이러한 질문은 하루의 밥벌이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기도 한다. 결국 이런 깨우침은 보다 올바른 것에 헌신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그러니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한 사르트르의 생각 또한 편향된 것이기도 하다.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일종의 축복인 셈이다. 이제 학교의 본질적 기능도 광장에서 찾아야 한다.

학교라는 곳에는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규정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처지에 있는 아이들의 상황을 접할 기회가 없다. 이렇게 어른이 되고 나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일상을 침범하는 존재를 용서하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범죄들 중에는 도무지 일반적인 상식과 관념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이 많다. 이러한 사건들을 파헤쳐 보면 타인과의 불협화음, 심각한 갈등이 숨어 있다. 이는 진정으로 소통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 사회와 기성세대들의 잘못이다. 그래서 더욱 학교는 광장이어야 한다.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아이들은 친구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파편적인 생각을 분석하고 이를 조화롭게 종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친구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하고 그 짐(load)을 함께 지고 갈 수 있는 희생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인간의 품격을 배울 수 있는 광장이 바로 학교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신이 알던 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사실이 아이들을 진정으로 품격이 있는 자유로운 사람으로 키운다. 이처럼 학교는 공동체 속에서 소통하면서 품격 있게 성장하게 되는 적극적인 몸부림의 현장이다.

광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유다. 가치 있는 일에 대한 헌신과 이를 실행하는 용기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몸부림이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라고 볼 수 있다. 레바논 태생의 미국 소설가⋅화가⋅시인⋅수필가인 칼린 지브란(1883~1931)은 소설 《예언자》에서 자유를 몸부림이라고 표현했다. 즉 “자유란 / 아무런 구속의 사슬이 없는 것이 아니라 / 더 큰 자유의 사슬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 마음이요 의지요 행동이다. / 궁극적으로 자유란 / 더 큰 자유의 사슬을 향하여 /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는 / 삶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 몸부림 바로 그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교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몸부림이다. 학교는 신자유주의가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시장(市場)으로 만들려는 세력을 비판하고, 더불어 개인만의 세계로 침잠하려는 아이들을 건져내며, 순응을 강요하는 국가 교육정책의 허상을 고발하는 몸부림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야 한다. 이로써 교사는 식어버린 열정을 다시 불태우고 자신의 익숙함에서 오는 매너리즘을 냉철하게 돌아보게 된다. 더 나아가 교사는 다른 직업의 사람들과도 잘 어울려야 한다. 왜냐면 동일성이 지배하는 공간에서의 안락함을 다른 시선으로 돌려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이에 대한 사례로 영화 《트루먼 쇼》에서 자신이 살던 거대한 세트를 벗어나려는 트루먼을 떠올려 보라. 이처럼 낯섦에서 오는 불편함을 삶 속에서 기꺼이 경험하면서 이를 긍정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 시대의 교사에겐 더 말할 나위 없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교사는 구체적으로 학교를 어떻게 광장으로 만들 수 있을까?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그것은 학교 밖을 나가지 않고 스스로 광장을 만들 수 있는 길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부터 시도해 보자. 먼저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교실에 가보거나, 동일 교과가 아닌 다른 과목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특별한 공간으로 간주되는 상담실이나 보건실에도 자주 가는 것이 요구된다. 그곳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삶의 다양성이 존재한다. 또한 돌봄 교실이나 방과후 교실, 급식실도 더없이 좋은 광장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찾아서 소통한다는 것은 이른바 학교 내의 무수한 섬을 서로 연결하는 것이다.

광장은 단지 지금과 같이 정치 세력화한 집단들이 자신만의 편향된 사상과 행동으로 왜곡된 신념을 관철하려는 곳이 아니다. 거기는 다양한 사고가 집단지성을 통해 건전하고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실천을 요구하고 또한 가꾸어 나가는 양심과 지성이 공존하는 토론의 장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성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가 광장이 되어야 하는 본질이다. 여기엔 이를 선도하는 교사가 존재해야 한다. 스스로 광장을 만들지 못하는 교사는 자신의 삶도 성장을 향한 열정으로 이끌 수 없다. 이는 결국 우리가 소망하는 교육 발전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한다.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혁신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교사는 가까운 곳에 있는 억압부터 제거해 나가야 한다. 억압은 언제나 안락함, 익숙함, 매너리즘 뒤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교사가 진정으로 존중받는 기성세대로 위상을 견고히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길이도 또 국가의 발전을 이끄는 백년대계(百年大計)의 주춧돌이다. 학교는 진정으로 건강하고 활기찬 젊은 마음, 폭넓은 학식, 적극적인 양심과 지성이 몸부림치며 살아 숨 쉬는 자유의 광장이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