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범의 교육해체] "자유롭고 싶다~"
[송재범의 교육해체] "자유롭고 싶다~"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0.09.02 16: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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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재범 서울 신서고등학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송재범 서울신서고 교장

코로나가 또다시 많은 학생들의 등교를 멈추게 했다. 1학기 때 그만큼 고생하고 함께 노력했으니, 2학기 때는 정상적인 학사운영을 고대했는데 코로나는 매정하게도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쯤 되니 코로나가 무섭다기보다는 정말 밉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너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그래, 정말 자유롭게 살고 싶다. 선생님과 학생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수업을 하고 싶고, 가림막이 없는 식탁에서 친구들과 마주 보며 식사를 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말하고 싶다. 코로나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그렇다. 문제는 자유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원하는 자유는 어떤 종류의 자유일까?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자유하면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이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이 제시한 자유의 두 개념, 즉 소극적 자유(negative freedom)와 적극적 자유(positive freedom)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소극적 자유’는 타인의 간섭 없이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로부터의 자유’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소극적 자유는 개인이 타인이 간섭 없이 자신의 의도나 행동을 자신의 마음대로 혹은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소위 간섭의 부재다.

반면 ‘적극적 자유’란 간섭의 부재를 넘어 자신의 의지와 이성에 따라 어떠한 행위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음을 말한다. ‘~로의 자유’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적극적 자유는 개인이 국가 운영에 참여하거나 국가에 인간다운 생활을 요구하는 것처럼 적극적이고 자율적으로 어떤 행위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넘어 생각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자유의 개념이 있다. 현대 공화주의를 대표하는 필립 페팃(Philip Pettit)은 두 가지 자유 개념 사이의 어딘가에 ‘비지배 자유(non-domonation freedom)’ 개념을 제시한다. 페팃은 비지배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 1879년 코펜하겐 왕립극장에서 처음 무대에 오른 헨릭 입센(Henrik Ibsen)의 「인형의 집」 이야기를 꺼낸다(필립 페팃, Just Freedom, 번역본 『왜 다시 자유인가』).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인형의 집」의 주인공은 젊고 성공한 은행가 ‘토르발트’와 그의 아내 ‘노라’다. 토르발트는 19세기의 관례에 따라 아내의 행동에 엄청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라를 너무나 애지중지한 토르발트는 노라의 어떤 행동도 거부하지 않았다. 노라는 19세기 유럽 여성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자유’를 누렸고 많은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노라가 진정한 자유를 누렸다고 할 수 있을까.

토르발트의 방임적 태도는 정치철학자들이 흔히 말하듯 노라에 대한 ‘불간섭’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유는 단순히 불간섭이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요구해야 하는 자유는 불간섭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 이상이다.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선택을 다른 사람의 허락 없이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간섭뿐 아니라, 로마 공화정 시대에 ‘지배’라고 불린 타인에 대한 예속의 부재를 요구한다. 즉 ‘비지배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다.”

페팃이 말하는 비지배 자유는 타인의 자의적인 의지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어떤 특정한 선택을 다른 사람의 허락 없이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섭의 부재’가 아닌 ‘지배의 부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간섭으로부터 자유롭더라도 타인의 자의적인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진정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한 노예에게 너무도 선한 주인이 있어, 노예가 어떤 행위를 해도 주인이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서[간섭의 부재] 노예가 자유인이라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주인을 만난 노예는 그렇지 못한 다른 노예보다도 상대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노예는 노예다. 지배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 한 노예는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일 뿐이다.

이런 지배와 자유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에게 지금 코로나는 어떤 존재일까? 포스트(post) 코로나 혹은 위드(with) 코로나를 외치면서 생존 전략을 찾고 있지만, 우리의 실존은 코로나의 지배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심하게 말해 코로나의 노예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희구(希求)하는 자유란 바로 코로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비지배 자유가 아닐까?

이 지배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지배 자유를 누려보자. 어떻게? 한숨 쉬어가자. 한숨 돌리고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얘기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잠시 쉬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것이 아닌가? 경쟁과 효율만을 앞세워 쉼 없이 달려온 우리에게 잠시 멈추어서 지금까지 우리가 달려온 길, 그리고 현재 나의 상태를 살펴보라는 얘기가 아닐까?

그런데 많은 칼럼과 토론회의 주장을 보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꾸 앞날과 성급한 생존전략만을 이야기한다. 차분한 성찰보다는 교육 당국의 플랜B가 뭐냐고 급하게 몰아세운다. 착한 주인은 노예에게 쉬어가면서 천천히 일해도 괜찮다고 하는데, 노예 스스로 숨을 헐떡이면서 과중한 노동을 일삼고 있는 모습이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잠시 숨 고르기의 기회를 주고 있는데, 우리 스스로 코로나에 지배되어 과로하고 있는 모습이다. 코로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인데, 우리 스스로 그에게 예속되어 노예가 되려고 한다. 비지배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 칼럼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모 교육단체 주관의 교육 관련 웨비나가 개최된다고 나에게 안내 문자가 왔다. 어김없이 주제 속에는 ‘뉴노멀’ ‘미래교육’ ‘교육혁신’ 등의 단어가 등장한다. 금년 들어 9월 현재까지 내가 이런 주제로 접한 교육 관련 토론회만 여섯 번이다. 교육을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상황에서 우리 교육이 나아갈 바를 여러모로 탐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충정도 갸륵하다.

하지만 잠깐만 쉬어가자. 애플의 교육 담당 부사장인 존 카우치(John D. Couch)는, 현재의 교육을 대본이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비유한다. 학생은 배우 역할을 하고, 교사는 작가(교육 정책 입안자)가 만들고 프로듀서(정치가와 행정가)가 승인한 아주 엄격히 정해진 대본(교과서)대로 배우들을 이끄는 감독이라는 것이다(존 카우치•제이슨 타운, Rewiring Education, 번역본 『교실이 없는 시대가 온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시대에 흥행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의 대본을 성급하게 요구하고 있다. 쉴 틈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우리 교육에 필요한 건 대본이 아니라 리얼리티다. 아무리 대본을 세심하게 만들어도 코로나가 지배하고 있는 교육 현장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하루하루가 리얼리티다.

하나의 TV 드라마가 끝나고 다음 드라마의 계획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는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다음 드라마의 대본을 작성하자는 것이다. 성급한 다음 교육 드라마의 대본 작성에 모든 힘을 소진하지 말고, 교육 현장의 리얼리티를 대비해 힘을 비축하자. 그래야만 코로나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코로나로부터의 비지배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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