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주의 사이다톡] ‘헐, 대박!’ 그 이상이 필요한 이유
[송은주의 사이다톡] ‘헐, 대박!’ 그 이상이 필요한 이유
  • 김민정 기자
  • 승인 2020.08.29 1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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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은주 언주초교사
송은주 서울 언주초교사
송은주 서울 언주초교사

교대 3학년 여름 방학에 아르바이트로 대학교 영재교육원의 조교를 했다. 영재교육원에 출강하시는 현직 선생님들의 수업 준비를 도와드리는 일을 맡아서 그날 강의를 맡으신 선생님들과 식사를 같이 할 때가 많았다. 어느 날 가장 고경력이셨던 선생님 한 분이 후배에게 말씀하셨다.

“요즘 애들 뭐만 하면 ‘헐~’ 하더라? 헐이 뭐야, 헐이.”

당시 혈기 있는 신세대 ‘대딩(대학생)’으로서 마침 ‘헐~’을 종종 쓰고 있었을 때라 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 순간에도 내 속에선 ‘헐~!’

“그러니까요. 황당해도 ‘헐~’, 놀라도 ‘헐~’, 짜증나도 ‘헐~’. 어감도 이상하고 너무 남발해대서 듣기가 싫어요.”

‘헐~그런가? 맞아, 헐~은 전천후 표현이긴 하지. 어감도 좀 이상하긴 해. 나도 처음엔 좀 어색했으니.’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헐이 뭐야 헐이”라고 하시는 대목에서는 기성세대에 익숙하지 않은 말을 쓴다는 사실 자체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당연히 두 어른의 대화가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다. ‘헉!’은 되고 ‘헐!’은 안 되나? 결국 다 감탄사인데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할 게 있나? 헐~.

그리고 11년이 지났다. 나는 그때의 선생님들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고 ‘헐~’은 귀여울 정도의 기상천외한 요즘 신조어들을 접하며 “헐이 뭐야 헐이”라는 말은 짧지만 많은 의미를 담은 표현이었다는 점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 말에는 익숙하지 않은 신조어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아름다운 기존 언어문화를 조금씩 깨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에 대한 반감도 있지만 ‘헐!’ 그 한마디가 대체해버리는 수많은 감정과 상황묘사에 대한 안타까움도 담겨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감정과 상황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으면 이로운 점이 많다. 까치의 깃털이 난 방향, 까만 줄만 알았던 목덜미 깃이 때로는 청록빛의 오묘한 색을 발한다는 사실을 세밀화를 볼 때 비로소 인식할 수 있듯 우리의 내면도 가느다란 색연필 같은 언어표현이 필요할 때가 많다. 상세하고 명료한 언어는 본인에게는 자기 생각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해주는 거울이 되고, 다른 사람과의 소통에서도 순환이 잘 되는 모세혈관이 되어준다.

그런데 “당혹스럽네!” “신기해.”라고 말할 순간에 “헐~”로 일갈해버리고 “놀라운데?” “기가 막히네.” “기가 찬다.”라고 말할 순간에 “대박!”이라는 말이 모든 것을 간단히 치환해버리면 우리는 그 편리함을 얻는 대신 ‘당혹스럽다, 신기하다, 놀랍다, 기가 막히다, 기가 찬다’라는 색연필들을 잃어간다.

글 쓰는 일이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면서 나의 언어에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아졌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는 말을 절감하는 날들이다. 어슴푸레한 생각을 조금 더 훤히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어휘와 문장이 있을 것 같은데! 마치 말을 배워가는 아이처럼 더듬거리거나 설단 현상을 몇 번을 겪어야 원래 의도와 그나마 비슷한 말들을 겨우 적을 수 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그동안 조금 더 섬세한 언어를 갈고 닦으며 살아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그러다 문득, 내 앞에서 노는 다섯 살 아들을 보니 나의 언어 세계가 아이에게는 처음 발을 담그는 바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교실에서 내가 만났던 아이들에게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줄 것이 더 많았더라면!’이라는 안타까움은 언어에도 예외가 없다.

나의 아이들이 내가 쓰는 말과 글에서 섬세한 감정표현과 묘사를 듣고 읽으며 자란다면,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가며 아이들도 자기만의 수백 수천 가지 색연필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다채로운 그들의 색깔로 더 많은 이야기와 삶에 대한 풍성한 감상을 나와 함께 나누어주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좋은 글을 찾아 읽고 우리말 꾸러미 책을 한쪽 펼쳐 본다. 그리고 하루에 한 두 번 정도는 바로 튀어 나가려던 ‘헐~ 대박!’을 주워 담고 다른 말을 가다듬어 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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