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대 3학년 여름 방학에 아르바이트로 대학교 영재교육원의 조교를 했다. 영재교육원에 출강하시는 현직 선생님들의 수업 준비를 도와드리는 일을 맡아서 그날 강의를 맡으신 선생님들과 식사를 같이 할 때가 많았다. 어느 날 가장 고경력이셨던 선생님 한 분이 후배에게 말씀하셨다.
“요즘 애들 뭐만 하면 ‘헐~’ 하더라? 헐이 뭐야, 헐이.”
당시 혈기 있는 신세대 ‘대딩(대학생)’으로서 마침 ‘헐~’을 종종 쓰고 있었을 때라 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 순간에도 내 속에선 ‘헐~!’
“그러니까요. 황당해도 ‘헐~’, 놀라도 ‘헐~’, 짜증나도 ‘헐~’. 어감도 이상하고 너무 남발해대서 듣기가 싫어요.”
‘헐~그런가? 맞아, 헐~은 전천후 표현이긴 하지. 어감도 좀 이상하긴 해. 나도 처음엔 좀 어색했으니.’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헐이 뭐야 헐이”라고 하시는 대목에서는 기성세대에 익숙하지 않은 말을 쓴다는 사실 자체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당연히 두 어른의 대화가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다. ‘헉!’은 되고 ‘헐!’은 안 되나? 결국 다 감탄사인데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할 게 있나? 헐~.
그리고 11년이 지났다. 나는 그때의 선생님들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고 ‘헐~’은 귀여울 정도의 기상천외한 요즘 신조어들을 접하며 “헐이 뭐야 헐이”라는 말은 짧지만 많은 의미를 담은 표현이었다는 점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 말에는 익숙하지 않은 신조어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아름다운 기존 언어문화를 조금씩 깨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에 대한 반감도 있지만 ‘헐!’ 그 한마디가 대체해버리는 수많은 감정과 상황묘사에 대한 안타까움도 담겨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감정과 상황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으면 이로운 점이 많다. 까치의 깃털이 난 방향, 까만 줄만 알았던 목덜미 깃이 때로는 청록빛의 오묘한 색을 발한다는 사실을 세밀화를 볼 때 비로소 인식할 수 있듯 우리의 내면도 가느다란 색연필 같은 언어표현이 필요할 때가 많다. 상세하고 명료한 언어는 본인에게는 자기 생각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해주는 거울이 되고, 다른 사람과의 소통에서도 순환이 잘 되는 모세혈관이 되어준다.
그런데 “당혹스럽네!” “신기해.”라고 말할 순간에 “헐~”로 일갈해버리고 “놀라운데?” “기가 막히네.” “기가 찬다.”라고 말할 순간에 “대박!”이라는 말이 모든 것을 간단히 치환해버리면 우리는 그 편리함을 얻는 대신 ‘당혹스럽다, 신기하다, 놀랍다, 기가 막히다, 기가 찬다’라는 색연필들을 잃어간다.
글 쓰는 일이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면서 나의 언어에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아졌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는 말을 절감하는 날들이다. 어슴푸레한 생각을 조금 더 훤히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어휘와 문장이 있을 것 같은데! 마치 말을 배워가는 아이처럼 더듬거리거나 설단 현상을 몇 번을 겪어야 원래 의도와 그나마 비슷한 말들을 겨우 적을 수 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그동안 조금 더 섬세한 언어를 갈고 닦으며 살아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그러다 문득, 내 앞에서 노는 다섯 살 아들을 보니 나의 언어 세계가 아이에게는 처음 발을 담그는 바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교실에서 내가 만났던 아이들에게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줄 것이 더 많았더라면!’이라는 안타까움은 언어에도 예외가 없다.
나의 아이들이 내가 쓰는 말과 글에서 섬세한 감정표현과 묘사를 듣고 읽으며 자란다면,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가며 아이들도 자기만의 수백 수천 가지 색연필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다채로운 그들의 색깔로 더 많은 이야기와 삶에 대한 풍성한 감상을 나와 함께 나누어주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좋은 글을 찾아 읽고 우리말 꾸러미 책을 한쪽 펼쳐 본다. 그리고 하루에 한 두 번 정도는 바로 튀어 나가려던 ‘헐~ 대박!’을 주워 담고 다른 말을 가다듬어 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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