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주의 사이다 톡]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는 말, 진심이세요?
[송은주의 사이다 톡]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는 말, 진심이세요?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0.08.02 0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 송은주 서울 언주초교사
송은주 서울언주초 교사
송은주 서울언주초 교사

2년 차 H와 13년 차 J는 동학년이다. 선배 J는 후배 H가 답답하다. J가 보기에 후배 H는 학년 전체 일보다는 자기 반이 더 중요한 것 같다. 학년에서 수합 해야 하는 통계나 문서가 있으면 겨우 날짜를 맞추거나 늦게 내기 일쑤고, 학년에서 나누어 해야 할 일이 있으면 H가 자원해서 맡겠다고 하는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선배 J가 보기에 후배 H는 사회생활과 공동체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신규다.

회식 날, 결국 선배 J는 그동안 H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는 말로 ‘이 쓴 약과 같은 말도 결국 너를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후배 H가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걸 보니 어느 정도 수긍하는 것 같았다. J는 다음날부터 더 빠릿빠릿할 후배의 모습을 기대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후배 H의 협업속도와 태도는 나아지지 않았다. J는 후배 H가 더욱 데면데면하게 자신을 대한다고 느꼈고, H의 말수는 더 줄어 속을 더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보통은 선배의 충고를 들은 후배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변화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한다. 자신의 업무태도에 대한 선배의 생각을 알고도 말없이 듣기만 할 뿐, 오히려 더 벽을 쌓은 듯한 태도는 H가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이라고 하는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중반~2000년생)이기 때문인 것만 같다. 하지만 소통할 줄 모르는 후배 세대라고 하기에는 선배 J도 밀레니얼 세대이니 통하지 않는다. 세대론은 개성 앞에서 힘이 없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H가 그냥 이기적인 부적응자인 것인가?

2년 차 H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H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잘못한 부분을 지적한 건 솔직히 인정하는 부분도 있긴 한데, 나는 ‘다 너 잘되라고 이러는 거야’라는 말이 황당했어. 그렇게 내가 잘 되길 바라면 평소에도 좀 신경 좀 써주지?”

그날, 선배 J가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는 순간, H는 “진심이세요?”라고 묻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H가 ‘건방진 후배녀석’이기 때문이 아니다. H는 선배의 진정성에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2년 차인 H는 매일 학급 경영과 업무에 쫓기듯 생활하느라 지쳐있었다. “담당자가 일 처리를 해야 하니 학년 일부터 빨리해 줘야 한다”라는 선배들의 말도 1년 차부터 줄곧 들어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선배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힘든지, 동학년의 속도를 맞추지 못하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를 묻기보다는 의무만을 이야기했다. 학생으로 치면 자기는 ‘느린 학습자(Slow learner)’인데, 교사이고 사회인이라는 명목은 인정사정없이 채찍질만 해대는 느낌이다. 정말로 자신이 자기 반을 먼저 챙기느라 일이 느리고, 학급 운영만이라도 만족스럽게 되고 있다면 우선순위를 바꿀 수라도 있지만 그조차 쉽지 않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일의 본질은, H가 교사라는 일을 배우는 사람 중에서는 느린 학습자에 속한다는 특수성에 있지 않다.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는 선배의 말에 ‘진심이냐’고 묻고 싶었다는 H의 말은, 충고하고 싶은 사람이 지켜야 할 인간적인 예의를 묻고 있다. 쓴소리도 애정이 있으니 한다는 말로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사실 애정의 요건에는 이해와 래포가 포함된다.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선생님이 앞으로 교직 생활 오래 할 거니까 하는 말인데”라는 말을 필요할 때만 이용한다고 느낄 때, 후배는 마음을 닫는다. 교직 생활을 해야 할 시간이 오래 남은 후배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선배라면, 그 마음을 평소에 표현했어야 하는 것이 ‘상식’아니냐고, 후배는 생각한다.

평소에는 어떤 이해의 모션도 없다가 일이 잘못되거나 개선이 필요한 경직된 순간에만 등장하는 이런 말들은 때로는 “교직 생활 오래 하고 싶으면 내 말을 들어”처럼 조언과 협박 사이 그 어딘가에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온화하게 상처 주는 말하기를 후배는 그렇게 배워간다.

단순히 선배라는 이름이 충고할 자격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충고에 상처받아본 사람은 충고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평소에 마음의 문을 두드렸던 사람만이, 듣는이에게 상처 주지 않으면서 ‘변화하고 싶다는 의지의 문’을 열 자격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