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범의 교육해체] 온라인 공간, 스승의 그림자를 찾아서
[송재범의 교육해체] 온라인 공간, 스승의 그림자를 찾아서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0.06.04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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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재범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장
송재범 서울교육연구정원장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교사의 위상과 존재감이 뿜뿜 넘치는 속담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고 스승을 밟는다’는 자조적인 말이 생겼다. 교사의 위상과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말이다.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 수업 상황에서 교사의 위상은 더욱 떨어져 콜센타 직원이 되었다. 일시 대체로서의 온라인 수업이 아니라 상시 대세로서의 온라인 수업이 된다면, 디지털 에듀테인먼트에 최적화된 소위 ‘강의의 신’ 한 두 사람으로 수업은 충분할 수도 있다.

외모가 멋지고, 말이 약간 빠르며, 디지털 리터러시가 뛰어난 스타 강사 몇 명만 있으면, 대부분의 교사는 필요 없다는 교사 무용론으로 흐를 수 있다.

학교 교육의 본질적인 목표는 학생들의 바람직한 인성과 사회성을 기르는 곳이기에 교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인성과 사회성 교육은 오프라인의 면대면 교육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에, 온라인 공간에서 그 많은 교사는 필요 없다는 반 쪽짜리 교사 효용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수업의 큰 특징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라인상에서 실제로 교사와 학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처럼 교사가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실재감(presence)이 결여된 온라인 상황에서 학생의 배움은 한계가 있다.

지식 수업은 가능하지만, 고차원적이고 복합적인 사고력 배양이나 인성교육 등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온라인상에서는 굳이 그 많은 교사가 필요 없고 잘 설명하는 똑똑한 몇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거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려면, 온라인 수업에서도 많은 교사가 꼭 필요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온라인 공간에서도 교사의 존재감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주어야 한다. 교사의 그림자가 보여야 한다. 이러한 필요성으로부터 새삼 떠오르는 용어가 교수 실재감(Teaching Presence)이다.

교수 실재감은, 교수자(교사)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고 느끼고, 학생이 그곳에 있다고 느껴서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Garrison et al, 2000). 말 그대로 실재감(presence)이라는 단어는 무언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느낌(the sense of being there)을 말한다.

그런데 교수 실재감은 단지 물리적으로 ‘교수자가 있구나’라고 느껴지는 존재감에서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교수자(교사)가 왜 이 내용을 가르치는지 그리고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교수자(교사)의 수업 목표와 핵심이 느껴진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학생에게 수업하는 선생님이 실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온라인 수업에서는 교사가 수업과 관련된 모든 일을 전담하고 있기에, 교수 실재감을 교사 실재감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교사 실재감이 학생들의 학습 성과와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 몇 명의 스타 강사가 아니라 모든 교사가 필요하다. 일부 학생이 아니라 모든 학생에게 살아있는 실재감(presence)을 뽐내면서 소통하고 교류하는 교사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온라인 수업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교사 실재감을 느끼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교사 실재감을 체감하게 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수업과 성장연구소에서는 이런 교사 실재감을 온라인 수업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교사 실재감의 구현 원리(BEING)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신을진, “온라인 수업과 교사 실재감”, 「코로나19 온라인 개학 시대, 우리 교육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좋은교사운동 온라인 정책 토론회, 2020.4.27).

1) 연결되는 관계 만들기(Building relationship)

2) 존재감 나타내기(Showing my Existence)

3) 수업의 흐름 이끌기(Taking INitiative)

4) 피드백으로 다가가기(Giving feedback)

교사 실재감의 관점에서 볼 때 온라인 수업에서 교사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모든 학생들의 학습 성과와 책임 수업이라는 차원에서 더 많은 교사가 필요한 것이다. 교사가 콜센터 직원이 된다는 것은 자기비하적 표현일 수도 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교사만 콜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학교의 담임 교사, 교과 교사가 학습을 위해 학생을 책임감 있게 콜 했을 때, 학생들은 응한다.

물론 도저히 어려운 일부는 있지만. 몇 명의 스타 강사가 자신의 추종자(?)들은 콜 할 수 있지만, 책임져야 하는 모든 학생들을 콜 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형편과 학업 수준을 고려한 책임 있는 개인별 맞춤형 교육을 진행할 수 있을까? 컴퓨터만 켜놓고 딴짓하는 학생들을 컴퓨터 앞에 바르게 앉혀놓을 수 있는 사람이 선생님 외에 누가 또 있는가?

온라인 공간에서의 교사 실재감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교사의 존재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권위적인 교사, 일방적인 지식 전달의 교사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교사상을 넘어 뉴노멀(New Normal)로서의 새로운 교사상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요구받고 있는 모습이 너무 많아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

‘조력자, 촉진자, 안내자, 가이드, 학습 코치, 학습 디자이너, 피드백 제공자, 티처(teacher)보다는 튜터(tutor), 배움의 장면을 연출하는 큐레이터, 콘텐츠 전문가보다는 맥락 전문가’ 등 글을 읽을 때마다 다양한 직종(?)들을 발견한다.

아마 교사는 배우여야 할 것 같다. 더 나아가 “인류의 삶과 시대의 흐름을 연관지어 볼 수 있는 판단의 틀을 갖고 학생들에게 통찰을 제공할 수 있는 파수꾼”(이수광, 2020)이라는 글도 보았다. 교사가 거의 종교인의 수준까지 이르러야 할 것 같다.

아마 이런 방향으로의 변화 요구 중 최첨단(?)을 달리는 것은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주장한 ‘무지한 스승’일 것이다(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2019). 교사와 학생 관계의 변화를 뛰어넘어 학생의 지적 해방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상대가 혼자 힘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설명은 교육자의 행위이기에 앞서, 교육학이 만든 신화다. 그것은 유식한 정신과 무지한 정신, 성숙한 정신과 미성숙한 정신,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똑똑한 자와 바보 같은 자로 분할되어 있는 세계의 우화인 것이다.

스승은 우월한 지능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지식을 학생의 지적 능력에 맞추어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이 설명의 원리로서 랑시에르는 이것을 바보 만들기(abrutissement)의 원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랑시에르는 또 학생들은 설명해주는 스승이 없이도 홀로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무언가를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혼자 힘으로 배워본 경험이 모든 사람에게는 있다. 스승과 학생의 관계는 지능과 의지의 관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스승의 우월한 지능으로 학생의 열등한 지능을 종속시키려는 것은 바보만들기다.

중요한 것은 스승과 학생의 의지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스승의 앎이나 학식을 전달하고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지능이 쉼 없이 자율적으로 실행되도록 의지를 북돋우는 데 달려있다. 의지와 지능의 이러한 분리가 ‘지적 해방’의 출발점이라고 랑시에르는 말한다.

결국 랑시에르에게 무지한 스승이란 학생에게 가르칠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다. 그는 어떤 앎도 전달하지 않는 무지한 스승이지만 다른 이의 앎의 원인이 되는 스승이다. 스승은 학생더러 구하던 것을 계속 구하라고 명령함으로써 학생의 앎의 원인이 된다. 스승은 질문을 통하여 본인이 모르는 것도 가르칠 수 있다. 질문을 하는 데는 어떤 학식도 필요하지 않다. 무지한 자는 무엇이든 물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무지한 스승이 필요한 것이다.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주인공은 황금이 든 행운의 자루와 자신의 그림자를 바꾼다. 그림자를 팔아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 그림자 없는 그를 사람들은 사람대접하지 않는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샤미소가 그리고 있는 그림자를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갖고 있는 성원권으로 해석한다.

즉,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일종의 자격인데,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회 안에서 설 자리, 설 장소가 없는 것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스승의 그림자, 밟히느냐 밟히지 않느냐 이전에 그림자가 있느냐 없느냐의 실존적 문제가 우선이다. 누구는 온라인 공간에서는 스승의 그림자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겁을 준다. 스승이 설 자리, 장소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사 실재감에서 보았듯이, 교육 공학적으로 스승의 그림자는 온라인 공간에서 꼭 필요하다.

스승은 도처에 필요한 것이다. 다만 그림자의 모습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지극히 권위적인 스승의 모습, 학생과 지적으로 평등한 관계에 있는 무지한 스승까지 양 극단 어디에서 스승의 모습은 다양한 그림자로 어른거린다.

스승의 날이 없어도 스승의, 교사의 그림자는 절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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