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기 칼럼] 춘화처리 교육: 군자란과 역경지수
[박남기 칼럼] 춘화처리 교육: 군자란과 역경지수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0.03.18 2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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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 한국교육행정학회장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한국교육행정학회장

2년 전 초봄, 지인으로부터 군자란(君子蘭)을 분양받았습니다. 예전에도 키워본 적이 있어서 별 생각 없이 다른 화분들처럼 거름 주고 볕도 잘 드는 곳에 둔 후 열심히 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듬 해 봄에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아마 가져올 때 뿌리를 너무 많이 잘라 그랬나 보다고 생각하며 다시 1년을 열심히 키웠습니다. 하지만 올 해에도 2월이 다 가도록 꽃대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골 식당 밖 외진 화장실에서 만난 군자란은 햇볕도 잘 들지 않는 그 추운 곳에서 튼튼한 꽃대를 자랑스럽게 피워내고 있었습니다.

제가 군자란 키운 것이 처음은 아닙니다. 귀국 후 15년간 고향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하던 시간동안 키우던 군자란은 매년 탐스러운 꽃을 피워냈습니다. 여름동안에는 햇빛 보고 비바람도 맞도록 마당에 있는 화단에 내놓았다가 겨울이 되면 얼까 걱정되어 내 방 머리맡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집이 옛날 한옥집이다 보니 문풍지 사이로 찬바람이 몰아쳐서 겨울에는 두꺼운 옷을 입고 이불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쓰고 자야했던 그런 방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군자란 잘 키우는 법’을 검색해보니 군자란은 겨울에 얼지 않을 정도의 추운 곳에 내놓아야 꽃대를 올리는 식물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겨울에도 따스한 곳에 두면 꽃대가 제대로 올라오지 못하거나 아예 꽃을 피우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꽃이 피기 위해서는 반드시 겨울을 경험해야 하는 식물이 있습니다. 겨울을 경험해야 봄에 꽃이 피는 것을 춘화현상이라고 합니다. 군자란이나 튤립, 수선화 등의 일부 알뿌리 꽃, 보리나 밀 등의 곡물이 춘화현상을 필요로 하는 식물입니다. 이 원리를 파악하여 이제는 냉장고를 이용하여 식물이 겨울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인간이 원하는 때에 꽃이 피게 할 수 있습니다. 인공적으로 식물이 겨울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춘화처리(vernalization)라고 합니다.

돌이켜보니 예전에 키우던 군자란은 그 추운 방에서 나와 함께 겨울을 보냈었기에 봄에 그렇게 탐스런 진홍색 꽃을 피워냈던 것입니다. 그냥 동해만 입지 않도록 돌본 것이 오히려 예쁜 꽃을 피우도록 돕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난 2년간 거름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햇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좋은(?) 환경을 마련해준 탓에 올 봄에도 군자란 꽃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문득 폴 스톨츠(Dr. Paul Stoltz)가 쓴 「역경지수: 역경을 기회로 전환시켜라」가 떠오릅니다. 역경지수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지능지수(IQ)가 아니라 역경지수(AQ: Adversity Quotient)가 높은 사람이 새로운 스트레스에 생산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어려서부터 주어진 힘든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왔는데 그러한 환경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역경지수를 높였던 것 같습니다. 그 힘들었던 시절이 오히려 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게 한 축복이었음을 두 해 겨울이나 꽃을 피우지 못하고 지나가는 군자란을 보며 새롭게 깨닫습니다. 요즈음 코로나19로 인류 사회가 기반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를 이겨낼 신체 면역력도 어렸을 때 감기에 걸리기도 하고, 유사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극복할 기회를 가질 때 자연스럽게 커진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도 대부분은 추운 겨울을 경험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아이가 잘 자라도록 한다며 고통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키우는 것은 오히려 아이가 자연스럽게 면역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성장하여 꽃피울 기회마저 빼앗는 우를 범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 아이는 나처럼 고생하지 않게 해야겠다며 더 편안하고 쾌적한 여건을 만들어주려고 애쓰는 것은 내 욕심 채우는 것이고, 아이가 역경지수를 기를 기회를 빼앗는 길입니다. 이는 군자란을 사랑하여 겨울에도 따뜻한 실내에서 키우려는 것과 유사합니다. 온실에서 그저 안락하게만 자라온 아이들에게는 특히 춘화처리 교육이 필요합니다. 동사하지 않을 정도의 역경 프로그램을 만들고, 아이들이 이를 헤쳐 나갈 기회를 줄 필요가 있습니다. 각종 스카우트 활동은 성장기 아이들을 위한 일종의 춘화처리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2월말, 비록 늦었지만 집에서 가장 춥고 어두운 북측 방으로 군자란을 옮겨놓았습니다. 그러나 3월 중순이 넘어도 꽃대가 올라올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늦게야 군자란 키우는 법을 터득한 탓에 올 해도 꽃 보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이 키우기와 달리 내년을 기약할 수 있어서 천만 다행입니다.

자료

봄꽃 개화 원리. https://bit.ly/39ZwUJP

Stoltz, Paul G.(1997). Adversity Quotient. Hoboken, New Jersey: John Wiley & 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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