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범의 교육해체] "이 도끼가 네 도끼냐?"
[송재범의 교육해체] "이 도끼가 네 도끼냐?"
  • 장재훈 기자
  • 승인 2020.01.31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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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재범 서울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장
송재범 서울교육연구정보원장
송재범 서울교육연구정보원장

“이 도끼가 네 도끼냐?”

도끼를 연못에 빠뜨려 난감해하고 있는 나무꾼에게 산신령이 금도끼, 은도끼를 차례대로 가지고 나타나 이렇게 묻는다. 나무꾼이 아니라고 하자, 산신령은 마지막으로 쇠도끼를 가지고 나타나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나무꾼은 쇠도끼가 자기 도끼라고 대답하고, 정직한 나무꾼에게는 금도끼와 은도끼가 함께 주어진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솝 우화의 금도끼은도끼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 산신령이 금도끼를 들고 젊은이들이게 나타나 ‘이 도끼가 네 도끼냐?’라고 물을 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금도끼가 내 것이라고 주장하면 안 되는가? 뜨거운 논쟁 중의 대입 공정성 문제가 이런 형편이다.

‘명문대학 입학’이라는 금도끼를 얻으려는 전쟁에서 누가 나무꾼과 같은 정직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명문대학 입학’이라는 금도끼 문제는 ‘정직’이 아니라 ‘정의’의 문제로 전환된다.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문대학 입학’이라는 기회는 어떻게 배분되어야 정의로운 것일까? 어떤 기준으로 각자의 몫에 해당하는 ‘명문대학 입학’이라는 보물을 나누어야 할까?

이러한 고민의 반추로서 세 권의 책이 생각난다. 우연히도 세 책의 저자는 우리가 ‘대~한민국’을 외치며 월드컵에 열광했던 2002년도에 생을 마감했다. John Rawls (1921~2002), Robert Nozick(1938~2002), Michael Young(1915~2002)이다. 그들의 주저(主著)를 따라 우리의 대입 공정성 논의에 대한 시사점을 찾아보자.

◇ John Rawls “공정한 절차에 따라서”

롤즈(Rawls)는 1971년 <A Theory of Justice> (황경식 옮김《정의론》)을 썼다.

“사상 체계의 제 1 덕목을 진리하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 1 덕목이다”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롤스에게 정의는 현대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필수적인 덕목이다.

정의에 대한 롤즈의 천착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의 원초적인 숙제를 어떻게 동시에 풀어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부터 출발한다.

그에게 있어 소득과 재산의 분배를 자연에 맡기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회가 정의롭다. 그래서 롤즈는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는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롤즈가 정의의 원칙 수립에서 중요시 여기는 것은 절차적 공정성이다. 절차가 공정해야 정의로운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순수절차적 정의(pure procedural justice)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는 정의에 대한 독립적인 기준은 없으나 공정한 절차나 규칙이 있어 그에 따르기만 하면 그 결과를 정의롭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 결과가 정의로운지는 알 수 없으나, 수행해야 할 공정한 절차를 통해서 정의를 담보할 수 있다는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를 말한다.

롤즈는 이러한 사례를 도박(gambling)으로 든다. 도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공정한 절차와 조건 아래서 도박을 했다면, 그 결과가 어떻든 공정한 것이라는 것이다.

롤즈가 주장하는 것은, 어떤 특정 결과가 정의롭다는 독립된 기준보다는 공정한 절차가 만들어지고 그 절차대로 제대로 수행되었다면 그 결과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롤즈의 의도대로 절차의 공정성이 정의로운 결과를 보장할 수 있을까? 시장경제 체제에서 순수절차적 정의만으로는 정의로운 결과가 나타날 수 없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롤즈도 시장이란 순수절차적 정의의 체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따라서 시장의 실패를 시정하기 위한 배경적 제도룰 구축하려는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대입 공정성 문제에 있어서 객관성,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이러한 절차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의 완벽하게 객관적이고 투명한 대입 절차를 구축했다고 해서(이게 가능한지는 별도의 문제로 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국민들이 그 결과에 승복할 수 있을까? 절차가 공정했으니 내가 불합격한 것은 당연하다고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 Robert Nozick “정당한 소유권에 따라서”

노직(Nozick)은 1974년 <Anarchy, State, and Utopia> (남경희 옮김《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을 썼다. 이 책이 롤즈 정의론에 대한 비판적 성격을 갖고 있듯이, 하버드대 동료 교수였던 롤즈와 노직은 정의 문제를 가지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얘기할 때 어떤 정의로운 형태(결과)를 상정한다. 노직은 이런 정형적(patterned) 원리의 정의론을 부정하고, 역사적(historical)이고 비정형적(unpatterned) 원리로서의 소유권리론(entitlement theory)을 주장한다.

즉, 정의의 기준으로서 일정하게 정형화된 정의의 결과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어떤 소유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가졌다면 정의롭다는 것이다.

이 원리에서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자신의 소유에 대한 소정의 소유권리를 갖고 있는지의 여부, 그리고 이 소유권리가 정당한 역사적 과정과 절차를 거쳐 취득되었는지의 여부다.

노직은 소유권리론을 농구 선수 챔벌린(Chamberlain)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미국 최고 인기의 농구 선수 챔벌린은 홈 게임마다 입장권 가격의 25센트가 그의 몫이 되도록 계약한다. 홈경기가 열릴 때마다 관중들은 입장료 중 25센트를 챔벌린의 이름이 붙어있는 별도의 상자에 집어넣는다.

한 시즌에 백만 명의 관중이 홈 게임을 관전하며 챔벌린은 25만 달러의 수입을 얻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챔벌린은 이 수입에 대한 소유권리가 있는가? 이 새로운 분배 상태를 불의라고 할 수 있는가?

노직의 소유권리론에 따르면 챔벌린에게 주어진 25만 달러는 관중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결과이고, 정당한 역사적 취득 과정을 거쳤기에 정의로운 분배다. 하지만 작은 자발적 행위들의 누적된 결과가 자유주의의 기획 자체를 침식하기에 이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날 챔벌린에게 25센트가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겠지만, 시즌이 끝난 후 챔벌린이 25만 달러를 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같은 입장일까?

대입 공정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챔벌린에게 25센트가 주어지는 것과 25만 달러가 주어지는 것에 대한 반응이 달라지듯이, 대입방식 자체가 아니라 각 방식이 가져오는 결과에 따라 공정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

학생부종합전형을 도입하는 시기에는 큰 불만이 없다가, 주요 대학의 학종 전형 비율이 70%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커다란 저항이 나타나는 현실을 보고 있지 않은가?

◇ Michael Young “각자의 능력(실력)에 따라서”

영(Young)은 1958년 <Rise of the Meritocracy, 1870-2033> (한준상․백은순 옮김《교육과 평등론 : 교육과 능력주의 사회의 발흥》)을 썼다.

영이 만들어낸 능력주의 사회(meritocracy)란 신분이나 재력과 같은 배경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비례해 보상을 해주는 사회 시스템을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능력(merit)으로 보아야 할까? 영은 ‘지능+노력’(intelligence and effort)을 개인의 능력으로 보았다.

소위 IQ가 능력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능력 즉, 지능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배분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 그런데 다음의 두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능력주의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자체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IQ가 125 이상인 모든 성인은 ‘능력 지배층’에 속한다. 그런데 IQ가 125 이상인 사람 중 상당수가 IQ 125 이상인 사람의 자녀다. 오늘날 지배층이 내일의 지배층을 낳는다. 예전 어느 때보다도 더 그렇다. 지배 계층은 사실상 세습되고 있다. 세습의 원칙과 능력의 원칙이 결합된 것이다.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구분되므로 불가피하게 계급 격차가 벌어진다. 높은 계급의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 의심이나 자기 비판으로 마음이 약해지지 않는다. 오늘날 성공적인 사람들은 그 성공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 그리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자신의 성취에 대한 정당한 보상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2020년을 사는 우리에게 실감나는 모습이다. “‘오늘의 지배층이 내일의 지배층을 낳는다’는 대목에서는 동류 짝짓기를 연상시킨다.”는 주장(리처드 리브스,《20 vs 80의 사회》, 2019)이 아프게 다가온다.

능력주의 사회가 심화됨에 따라 이런 모순과 갈등으로 인하여 능력주의 사회는 위기에 처한다. 결국 책의 후반부에서 영은 데모크라시를 다시 불러들이고 메리토크라시는 무너진다.

영은 능력주의 사회의 어두운 면을 경고하기 위하여《능력주의 사회의 발흥》이라는 디스토피아 소설을 썼다. 그런데 그의 의도와는 달리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능력주의 사회의 구현을 정책 목표로 삼았고, 미국인들은 능력주의를 대학교육은 물론 아메리칸 드림의 이론적 기반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미국에선 능력주의가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말이 되었고, 우리 사회에서도 “개천에서 용난다”는 표현이 말해주듯 긍정적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역사적 맥락과 모순을 갖고 있는 능력(실력)주의가 대입의 공정성을 가늠하는 합리적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내 능력(실력)과 노력으로 명문대학 입학이라는 금도끼를 얻었는데 왜 문제삼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편에서는 ‘그 능력(실력)이 순수한 너의 개인 능력인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렇게 능력(실력)의 의미와 형성과정에 대한 상호 불인정 속에서, ‘배경보다는 개인의 능력(실력)과 노력만 반영되는 입시여야 한다’는 주장이 실질적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위의 세 책으로부터 대입 공정성과 관련하여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첫째, 능력(실력)주의 사회의 한계를 직시하자. 앞에서 살펴본 롤즈(Rawls)의 공정한 절차, 노직(Nozick)의 정당한 권리, 영(Young)의 개인의 능력(실력) 중 우리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준은 개인의 능력(실력) 중심이다.

그래서 대입 기회도 개인의 능력(실력) 중심으로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메리토크라시라는 용어가 경고와 풍자의 의미로 만들어졌듯이, 능력(실력) 중심주의 사회는 많은 모순을 갖고 있다.

박남기는 우리 사회가 다음과 같은 실력주의에 대한 네 가지 신화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실력의 배신』, 2019)

1) 실력주의 사회는 공정하고 바람직한 사회라는 믿음이다.

2) 우리 사회는 실력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믿음이다.

3) 학벌을 타파하면 실력주의 사회가 구현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4) 실력주의 사회가 구현되면 우리가 꿈꾸는 공평한 세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능력(실력)주의 사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신화요 오해라는 것이다. 가장 큰 오해는 ‘실력 형성 요인’에 놓여 있다. 실력이 부모나 다른 요인과 무관하게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진 결과이고, 또한 그럴 수 있다는 착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착각 때문에 실력을 기준으로 사회적 지위와 재화를 배분하는 것은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장은주가 우리 사회의 메리토크라시 이념은 과두특권독점체제의 실상을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가상이고 체제의 공고화에 기여하는 배재적 헤게모니라고 비판한 것을 새겨들어야 한다.(「한국사회에서 ‘메리토크라시의 발흥’과 교육 문제」, 2011)

현실 세계에서의 경쟁은 단순한 일회적 경주가 아니라 세대 간 릴레이 경주다. 대입에서 지역균형선발과 같은 적극적 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를 시행해도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메리토크라시 논쟁은 능력(실력)주의 사회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러한 모순을 안고 있는 능력(실력)주의 사회의 그림자일 뿐이다.

둘째, 대입 공정성에 대한 절대적 기준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자. 롤즈(Rawls)의 공정한 절차, 노직(Nozick)의 정당한 권리가 현실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고, 영(Young)의 능력(실력)주의도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과 다르다면, 다른 기준을 탐색해야 한다. 박남기가 ‘신실력주의’를 제시하는 것도 이런 시도의 하나다.(『실력의 배신』, 2019)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대입의 공정한 원칙(기준)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어느 한 교수가 쓴 신문의 글을 보면(서현,「중고차 시장이 된 대학입학시장」, 2020.1.17.), 학생들에게 교양 수업에서 정시와 수시 중 어느 것이 더 공정한지 설명하라는 과제를 냈다고 한다.

백 명이 넘는 학생들의 결론은 명료했다고 한다. 본인이 입학한 과정이 더 공정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인식의 분열이 상존하는 가운데, 대입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을 만들라’라는 요구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는 다르다. 게임의 경우에는 오늘 득점이 내일 경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내일 다시 새로운 경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재화 획득 게임은 다르다. 현실의 게임은 어떤 의미에서 결코 끝나는 일이 없으며 패배자는 영원한 패배자로 남을 수도 있다. 이런 현실에서 공정한 대입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기회균등의 원칙도 가족제도가 존재하는 한 불완전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대입 공정성에 대한 논의는 절대적 기준에 대한 창조적 관점이 아니라 구성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모든 사람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을 왜 만들어내지 못하느냐고 채근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 환상을 벗어나야만 구성적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셋째, 게임의 규칙을 넘어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을 기획하자. 앞서 얘기했듯이, 대입 공정성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담론은 능력(실력)주의다.

명문대학에 합격한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의 능력(실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합격한 사람들은 불공정한 입시시스템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부족함을 인정하려 한다.

그래서 능력 겨루기 게임에 지속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의 규칙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한다.

이런 꼬리물기식 능력(실력)주의 게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사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윤리적 기획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어떤 이즘(주의)을 주장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상이 어떤 사회를 추구하느냐는 것이다.

휴머니즘이 그렇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그렇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지배 담론인 능력(실력)주의에는 그것이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사회 모습에 대한 기획은 없이, 공정한 게임 규칙 만들기의 알고리즘으로만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대입 공정성에 대한 논의는 방법론 찾기가 아닌 기획력 회복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공정한 게임 규칙 만들기가 아닌, 우리가 꿈꾸는 바람직한 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획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기획을 통하여 우리 교육과 대학은 어떠해야 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대학교육 기회는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의 방식으로 논의가 전개되어야 한다. 이런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기획으로부터 출발할 때, ‘이 도끼가 네 도끼냐?’는 산신령의 선택 요구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신령님, 그게 선택 사항입니까? 쇠도끼가 진짜 도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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