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정 칼럼] 완벽에 대한 반론-한국사회에서 교육은 우생학의 다른 이름인가?
[한희정 칼럼] 완벽에 대한 반론-한국사회에서 교육은 우생학의 다른 이름인가?
  • 김민정 기자
  • 승인 2019.08.28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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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희정 서울실천교육교사모임대표
한희정 서울 정릉초교사
한희정 서울 정릉초교사

“원서 마감은 보름 앞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우리 부자는 매일 다큐멘터리 한 편씩을 봐야 했다. 그것도 사회성 짙은 문제작 위주였다. 아들이 어려서부터 다큐멘터리를 즐겨 봤고 그를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처럼 자기소개서를 꾸미기 위해서였다. 15일 동안 본 다큐멘터리를 15년에 걸쳐 본 것처럼…”

전 청와대 대변인이 기자이던 시절 내보냈던 자녀의 자소서 쓰기 경험에 대한 글이다.

“나는 아이에게 인터넷에 떠다니는 것을 아무거나 긁어 오면 안 된다고 말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몇 권의 책에서 대공황에 관한 대목을 찾아주었다. 그 책들은 사실 고등학생이 읽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에 먼저 대공황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고 책을 읽게 했다(사회과학을 전공한 엄마가 없는 아이들은 어떻게 숙제를 하는 걸까?)."

한 문화인류학자가 고등학생 자녀의 수행평가 숙제를 도와준 경험에 대해 쓴 칼럼이다.

처음 이런 글을 접했을 때 나는 ‘자기소개서 쓰기’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엄연히 지침 위반임에도 ‘수행평가’를 과제로 낸 교사들을 비난했다.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고백적 글쓰기를 계속 접하면서 ‘자기소개서를 스스로 써 내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수행평가를 과제로 내는 몰상식한 교사를 둔 불쌍한 학생들 중 스스로 수행평가 과제를 하는 아이들은 얼마나 될까?’ 의문이 들었다.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로 큰 파장을 던져준, 그래서 자식의 수행평가 정도는 거뜬히 도와줄 수 있는 식자층의 집에 한 권씩은 꽂혀 있다는 그 책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10여 년 전에 “완벽에 대한 반론”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욕망과 생명윤리, 삶의 윤리를 논했다.

낯선 낱말일지 모르지만 우생학은 긴 역사와 함께 우리 생각의 근저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씨가 좋아야 한다, 집안 내력을 보면 알 수 있다’와 같은 아주 평범해 보이는 생각 속에도 우생학의 뿌리가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에 극에 달했던 우생학은 홀로코스트의 광포함 속에 소멸의 길을 걸었지만 ‘인간게놈프로젝트’와 함께 ‘자유주의 우생학’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고 있다고 샌델은 진단한다.

유전공학을 통해 지능, 신체, 외모, 질병 등을 선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실제로 아이비리그 대학의 교내 신문에는 키가 175cm 이상, 탄탄한 몸매, SAT 점수 1400점 이상, 가족병력이 없는 여성이 난자를 제공하면 5만 달러를 지불한다는 광고가 올라온단다. 이런 조건을 갖춘 여성은 상류층이 많을까? 빈곤층이 많을까? 정자 은행도 다르지 않다. 정자 제공자 카탈로그에는 신체적 특징, 인종, 대학 전공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정보가 실려 있고 추가 비용을 제공할 경우 성격이나 기질 검사 자료로 받아 볼 수 있다.

이런 내용을 접하면 우린 일단 불편함을 느낀다. 무엇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일까? 돈이 있으면 자식을 선별할 수 있다는 건가? 이 부분 아닐까? 왜냐하면 대다수는 늘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당당하게 말한다. “만일 고객들이 고등학교 중퇴자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의 정자를 제공”할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을 자유와 선택의 문제로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우생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자유지상주의자인 로버트 노직 같은 사람은 “유전학적 슈퍼마켓”을 제안했다고 한다.

2019년 한국사회를 본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어떠한가? 돈으로 자식을 선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돈으로 자식을 입시에서 선별 당하고 선택 당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는 같은가, 다른가? 어느 누구도, 어떤 부모도 이 질문 앞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이 모든 것에 자유이자 권리라는 이름을 붙여 왔기 때문이다. ‘내 돈으로 내가 하겠다는데 뭔 소리냐, 없어서 못하는 것뿐이지.’ 이미 이런 인식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강화(돈으로 유전자를 선별하는 행위-필자 주)를 둘러싼 논란에 내재한 도덕적 의미는 자율성이나 권리 같은 익숙한 개념만으로, 또 비용과 이익의 계산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화에 대한 나의 우려는 그것이 개인적 악덕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습관과 존재 방식에 결부되는 문제라는데 있다."(샌델, 앞의 책, 128쪽)

개인적 악덕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습관과 존재 방식의 문제이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은 ‘우연’하게 나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이것에 겸손하고 감사하며 이 ‘우연’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과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샌델은 말한다. ‘우연’에 대한 겸손이 사라지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면 그 선택은 곧 ‘자유’가 되고 ‘권리’가 되는 것이다.

2019년 우리 사회는 요즘 아이들 불쌍하다고 하면서 어느 누구도 쉽게 사교육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나만 안시키면’이라는 불안감에 옭죄인다. 그러나 누구에게는 그런 선택권조차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사)교육은 자유주의 우생학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 우생학적 지형 속에서 수시와 정시, 학종과 수능의 논란은 그저 우리 사회 상위 30퍼센트들의 논쟁일 뿐이다.

상위 10%는 그 위의 9%에 대해, 상위 30%는 그 위의 29%에 대해 갖는 것이 상대적 박탈감이다. 이미 내가 누리고 있는 상위 30%의 자리도 나머지 70%에게는 넘사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성하지 못하는 사회는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어차피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는가? 그들만의 리그는 도덕적이지 못한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흙탕이 돼버린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고공 행진, 그리고 법무장관 임명자에 대한 아무말 잔치까지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내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이미 있는 자들의 아귀다툼’이다. 마음의 습관과 존재방식의 문제다. 그럼에도 오늘도 묵묵히 교단에 설 수 있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러시아 헤르첸 교육대학에서 새 시대를 이끌어갈 교사들을 데리고 병든 몸을 이끌며 강의를 했던 비고츠키의 혜안 때문이다.

“어떤 기능 발달의 경로가 길면 길수록 그것은 유전에 의한 직접적 영향을 덜 받는다는, 즉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어떤 기능의 발달 경로가 짧으면 짧을수록, 그것은 직접적으로 유전으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습니다. 눈 색깔을 예로 든다면, 이 특징은 인간 발달에서 긴 경로를 필요로 할까요? 짧은 경로면 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유전에 의해 최대로 조건 지어집니다. 인간의 고등 기능들, 예컨데 성격, 윤리적 신념, 세계관 등을 예로 든다면, 어떤 기능을 성취하는 경로가 길면 길수록, 다른 조건이 동일할 때, 그것은 유전에 덜 직접적으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발달이 유전적 경향을 단순히 실현하거나 수정하거나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발달은 그러한 경향들에 새로운 것을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했듯이 발달은 유전적 경향의 실현이며, 발달 과정에서 새로운 것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바로 특정한 유전적 영향을 통해 굴절된 것입니다.” 비고츠키. 비고츠키 연구회 역(2015). 성장과 분화-비고츠키 아동학 강의Ⅰ. 서울: 살림터. p.131

유전만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환경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유전적으로도 우수하고 환경적으로도 우수하다고 모두 법무장관 후보의 딸처럼 그렇게 노력하며 자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 인간의 발달과 행복의 비밀이 있다. 나에게 있는 권력과 부를 나를 위해서만 쓰는 자와 아닌 자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한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교실에서 최선을 다해 우리반 아이들의 발달을 도울 것이다. 남과 비교해 없는 것을 탓하지 않고 오늘을 즐기며 분별력 있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마음의 습관과 존재방식을 사유할 수 있는 어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다. 입시에 소모하는 모든 것의 절반만이라도 유․초․중학교 교육과 가정교육에 소모하는 것, 그것이 교육이 우생학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가는 최선의 지름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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