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프레스의 눈] 고전은 힘이 세다
[에듀프레스의 눈] 고전은 힘이 세다
  • 장재훈 기자
  • 승인 2019.06.15 1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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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은균 군산영광중교사/ 나의교육, 고전읽기 저자
정은균 군산영광중 교사
정은균 군산영광중 교사

나는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있던 1990년대 말경부터 옛것을 좋아하는 ‘호고주의자(好古主義者)’ 같은 사람이 되었다. 국어 문체의 변천 과정을 통시적으로 살피는 박사 학위 논문 집필 계획을 세운 뒤 우리나라 고전 문학과 서지학 관련 강좌들을 본격적으로 접하면서부터였다.

그 전에는 미국 언어학자 놈 촘스키에게서 태동한 생성 문법론, 유럽의 구조주의 이론과 포스트 모더니즘, 텍스트론과 기호학 따위에 푹 빠져 있었다. 당시 그것들은 인문학 분야에서 상당히 ‘핫한’ 학문 분파로 간주되었다. 나는 내심 첨단 학문을 영접해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에 목에 꽤 힘을 주고 다녔던 것 같다.

내가 처음 호고주의자 비슷한 사람으로 바뀌는 데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지성으로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쓴 움베르토 에코였다. 나는 에코를 텍스트론과 기호학 저작들을 읽으면서 알았는데, 《장미의 이름》도 그런 독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작품이었다.

《장미의 이름》은 놀라웠다. 2권으로 된 그 멋진 책에서 에코는 특유의 백과사전적인 박학다식과 감식안을 활용하여 서구 지성사를 장식한 수많은 학자들과 그들이 쓴 고전들을 선별한 뒤 소설 플롯을 끌어가는 장치로 활용하였다. 무겁고 어렵고 딱딱하게만 보이는 고전이 그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데 중요한 소재로 쓰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선했는지 모른다.

《장미의 이름》이 보여준 짜릿한 스릴의 정점에 서구 문예학의 정전이랄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있었다. 이 점은 내게 뜨거운 영감을 주었다. 나는 곧 고전 문학 《춘향전》이 출현하여 확산하는 과정을 모티프로 하는 역사 소설 한 편을 머리에 떠올렸다.

나는 근대 이전을 살았던 사람들의 세계관과 삶을 대하는 태도,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생각하고 글 쓰는 방식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소설 배경으로 설정한 조선 후기를 다룬 생활사 저작들과 역사물, 이옥과 김려, 박지원과 정약용 등 당대 문필가들이 쓴 책들을 손에 쥐고 읽었다.

그렇게 자료들을 챙겨 보면서 원고지 450매 정도를 썼다. 맨 마지막으로 원고지를 채운 때가 육칠 년 전이다. 나는 그 이후로 원고지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지만, 처음 소설을 쓰리라 작정하고 읽은 책들과 함께한 행복한 시간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은 고전이 우리가 꼭 읽어야 하지만 결코 읽지 않는 책이라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사람들 사이에서 고전 작품으로 대접받는 까닭을 알기 힘든 고전들이 적지 않다고 보지만,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은 대개 나름의 ‘힘’이 있다. 내가 미완의 역사 소설을 쓰면서 읽은 책들을 ‘고전’으로 칭할 수 있다면, 나는 그들을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일의 근본을 말없이 비춰 주는 거울에 빗대고 싶다. 그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삶은 시간의 고금과 장소의 사방을 막론하고 거의 비슷하다.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어떤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으며, 내일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가 어떠한지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만의 대답을 내놓지만, 그렇다고 궁금증이 시원하게 풀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질문 속으로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불안감이 커진다.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는 데 따지고 살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오래된 미래인지 모른다. 행복한 삶의 본질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일 텐데, 나는 이 사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역사의 변천에 따라 달라지는 시대 현실이나 사람들의 일상적인 존재 조건을 규정하는 정치 체제 같은 것은 부차적이다. 나는 고전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진실’이 이런 데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고전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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