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 ‘원 터치(one touch)’와 ‘온 디맨드(on demand)’
[교육칼럼] ‘원 터치(one touch)’와 ‘온 디맨드(on dem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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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2.11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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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인기 경인교대교수

‘원 터치(one touch)’와 ‘온 디맨드(on demand)’

 

 

속도도 일종의 욕구이다. 엄청난 충동의 욕구이다. 중독성도 있다. 배설에 준하는 쾌감을 준다. 속도에 유혹되기 쉬운 것에는 복수심이 있다. 성급한 복수가 100% 실패하는 것은 속도에 대한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데서 온다. 느린 복수의 종말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신기하게도 용서나 화해로 귀결되도록 이끌려 간다. 시간의 진정한 힘은 여기에 있다. ‘원 터치’나 ‘온 디맨드’는 시간의 섭리에 대한 가당치 아니한 반항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의 신에 대한 바벨탑 쌓기가 될 수도 있다.

 

1.

연전 이태리 밀라노 여행에서 손 편지로 쓴 엽서 한 장을 국내의 친구에게 보내려고 밀라노 중앙역 근처의 우체국에 들어 간 적이 있었다. 창구에 그저 대여섯 사람 정도가 줄을 서 있어서 나도 그 뒤에 가서 섰다. 나는 내 동료 일행을 역 광장에 두고 잠깐 우체국 좀 다녀오겠노라고 하고 우체국에 들어 왔기에 빨리 일을 마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편물 접수 처리를 하는 직원의 일 속도가 너무 느렸다. 손님의 시시콜콜한 질문과 주문에 모두 한도 끝도 없는 대답을 해 준다. 또 준비나 절차에 문제가 있는 손님에게는 그 준비를 대행해 주듯이 시간을 쓴다. 갈 길이 먼 나는 울화통이 터졌다. 한국에서라면 아마도 뒤에서 벌써 항의성 고함이 터졌을 것이다.

프랑스 파리 동부 역에서 독일 슈투트가르트 행 열차의 표를 발권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긴 행렬 뒤의 다급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느릿느릿 일을 처리하는 역무원의 한가로운 표정! 우리 일행은 그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자칫하면 계획한 열차를 놓칠 수 있다. 그러면 그 이후 일정은 낭패이다. 심한 스트레스를 겪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IT 강국인 우리나라의 빠른 업무 처리 속도에 자부심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이미 오래 전 일이니까 프랑스나 이태리도 이제는 이런 일들이 빠르게 전산화 되어 상당히 나아졌을 것이다.

미국에 연구교수로 간 동료 교수들의 경험담 속에도 이런 경우는 자주 발견된다. 미국의 어떤 주에서는 소지하고 있는 국제운전면허를 근거로 현지의 운전면허를 다시 확인받는 데에 모두 일곱 번을 해당 관공서에 가게 한단다. 한 창구에서 원 터치로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꿈이라고 한다. 이 창구에서 저 창구로, 이 기관에서 저 기관으로 그렇게 거치고 거처서 다녀오기를 요구한다고도 했다. 석 달 가까이 걸려서야 겨우 받았다는 이야기 등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모두는 빠른 속도로 처리하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견디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선진국인데 오죽 잘 되어 있으랴. 그런 기대가 우리들 마음에 자동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막상 그렇지 못한 상황을 경험했을 때,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첨단 IT 시대의 원 터치(one touch) 시스템과 온 디맨드(on demand) 환경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곳으로 여행을 갔다면, 더러 현실적 불편은 있더라도, 그런 정도의 심리적 고통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도의 지방에 가면 열차나 버스는 시간표대로 운행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대합실에서 무작정 긴 시간을 안내 방송도 없이 기다려야 하는 일이 다반사(茶飯事)로 있으니까, 아예 그럴 줄 알고 여행을 떠나라고 한다. 이 충고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가면 정말 현지는 그러하다. 그렇지만 못 견디겠다거나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정서적 불편 지수는 앞의 유럽이나 미국에서처럼 높아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빠르다, 느리다, 하는 것을 문화적으로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달리 말하면 ‘빠르다는 것’을 어떻게 가치화 하고 있는지, ‘느리다는 것’을 어떻게 의미화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빠른 것에 좋은 점수를 주고, 느린 것에 나쁜 점수를 주는, 우리들의 문화적 관행 내지는 사회 심리적 습관에 대해서 한번쯤 철학적 성찰(reflection)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순수한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 통념을 의심하는 전복(顚覆)의 사고도 필요하다.

 

2.

원 터치(one touch)는 다소 경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한 방에 해결하기’ 정도로 해석됨직하다. 실제로 광고나 홍보에서 원 터치의 편리함이나 효과를 들먹거리며 소비자를 유혹할 때의 정서적 분위기는 이런 빠르고 경쾌한 의미의 무늬를 강하게 띠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누리는 빠르고 경쾌함에는 어떤 그늘이 없는 것일까. ‘한 방에 해결한다.’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심리 기저에는 이미 맹목의 속도주의가 들어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속도주의는 은연중에 폭력성과 친한 인연이 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야말로 속도 제일주의의 깊은 내부에 폭력성이 들어 있음을 보여 준다. 주먹으로 해결하는 것만큼 속도를 얻는 것은 없다. 속도 때문에 생기는 사고에는 그만큼 폭력성이 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교통사고도 그렇지만 심리적 욕구의 충돌도 그러하다. 원 터치를 추구하는가. ‘한 방에 날려 보내 버린다.’는 말에서 은연중에 모종의 쾌감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영혼은 속도의 유령에 이미 인질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원 터치(one touch)에는 터치하는 순간 돌아 올 수 없는 불회귀(不回歸)의 기제로 굴러간다. 한번 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패턴으로 진행되는 모든 일에는 중간 과정의 착오나 실수를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인생살이에서 중간 과정의 실수나 오류는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된다하더라도, 인생의 긴 과정에서 보면 그 모두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원 터치의 인식론은 어찌 보면 무정하고 냉정하다. 원 터치 세탁기에 옷감을 잘못 넣고 돌린다면, 중간에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그 옷은 속절없이 못 쓰게 된다. 망가지면 고치기도 어렵다.

온 디맨드(on demand)는 글자 그대로 하면 ‘지금 바로 요구(수요)에 응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다. 요구와 해결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태를 잘 의미화 한 말이다. 이때의 ‘demand(요구)’가 합리적이지 않고 충동적이거나 도발적인 것이 될 때, 그 ‘demand(요구)’는 윤리적이지 못할 수 있다.

예컨대 한밤중에 텔레비전에서 피자 광고나 치킨 광고를 보다가, 배가 고프지 않는데도 그것을 충동적으로 주문한다. 이 주문은 비합리적이다. 우선 소화에 좋지 않다. 위에 부담을 준다. 비만을 조장한다. 소비 자체도 불필요한 소비이다. 더구나 시켜서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면 더욱 그렇다. 이런 경우 다음날 아침 대개는 후회한다. 그러니 텔레비전 광고가 식욕을 충동하여 피자니 치킨을 주문하도록 했다는 것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이다. 불필요한 피자나 치킨을 주문 구매하도록 한 결정적인 요인은 ‘온 디맨드’ 그 자체이다. 이것이 없다면 한밤중 주문은 엄두조차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온 디맨드’의 환경 때문에 우리들 주변의 그 누군가는 더욱 어려운 노동의 조건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즉시 만족(온 디맨드)’을 높이기 위하여 피자 가게 주인들은 종업원에게 더 빠르게 오토바이를 달려 배달할 것을 독촉한다. 수요자의 욕구를 즉각 그리고 완벽하게 만족시켜 공급하기를 지상의 과제로 삼는 ‘온 디맨드’를 이렇듯 경쟁적으로 밀고 나간다면, 공급자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 조건은 더욱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교사들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온 디맨드’의 주문이 강해질수록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절박한 실업자들이 아무 일이나 해야 하는 쪽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Newspeppermint 2014.12.23. Quartz)

3.

‘원 터치(one touch)’와 ‘온 디맨드(on demand)’, 이 말을 이처럼 외국어 그대로 쓰려는 것에도 속도의 유령이 들어 있다. 말의 의미와 배경을 음미할 틈도 없이 그냥 생짜배기 영어로 주저앉혀서 냉큼 그대로 써 먹으려는 풍토에 우리의 속도 중독을 본다.

온 디맨드는 누군가 이 말의 문화적 맥락을 잘 살려서 이미 ‘즉시 만족’이라는 제법 그럴듯한 우리말 번역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신문이나 방송은 이렇듯 고심하여 만들어 놓은 우리말 용어를 쓰지 않는다. 또 이른바 ‘여론을 만들어 가는 유식한 사람들’(이 말도 굳이 ‘오피니언 리더 opinion leader’라고 해야지 뜻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도 그냥 ‘온 디맨드’라고 우리말처럼 태연하게 말할 뿐, ‘즉시 만족’이라는 우리말 번역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번역으로 옮길 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세계로 바로 통하는 영어면 더 좋지.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야말로 속도주의의 망령에 끌려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 터치나 온 디맨드, 이는 일종의 기계주의 취향이다. 그리고 소비 주체로서만 자아를 강화시키는 사람들의 편벽됨이 조장된다. 원 터치나 온 디맨드를 ‘완벽의 기제’로 보려고 하는 것은 효율 중심 완벽주의에 갇혀 있는 매우 허술한 사고이다. 이는 우리가 그토록 비판해 온 결과중심 인식론에 훨씬 더 가까이 닿아 있다.

속도도 일종의 욕구이다. 아니 엄청난 충동의 욕구이다. 중독성도 있다. 배설에 준하는 쾌감을 준다. 특히 소비 문명이 속도를 옹호하는 것에 현혹되지 말자. 모든 현혹 기제에는 속도가 숨어 있다, 사기꾼에게 속는 것 중에는 속도를 재촉하여 목표에 빨리 가려는 욕심이 숨어 있다. 속도에 유혹되기 쉬운 것에는 복수심이 있다 특히 배반에 대한 복수는 속도를 올라탄다. 성급한 복수가 100% 실패하는 것은 속도에 대한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데서 온다. 느린 복수의 종말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신기하게도 용서나 화해로 귀결되도록 이끌려 간다. 시간의 진정한 힘은 여기에 있다. ‘원 터치’나 ‘온 디맨드’는 시간의 섭리에 대한 가당치 아니한 반항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의 신에 대한 바벨탑 쌓기가 될 수도 있다. 성찰이 필요하다.

글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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